레닌그라드의 기적 - 네덜란드 문학 다림세계문학 15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페이터르 파울 라우베르다 그림 / 다림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쟁이 싫다. 아이들이 죽음을 매일 봐야만 하는 전쟁이 싫다. 우스운 생각일진 모르나, 할수만 있다면 아이들을 모두 다른 곳에 피신 시킨채 어른들만 전쟁을 했으면 좋겠다. 물론 전쟁이 없는게 제일 이상적일테지만, 그럴수 없다면 최소한 아이들에게만은 전쟁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았으면 한다. 악몽이 현실이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들의 상처는 깊어질대로 깊어진다. 또 이미 공포를 맛 본 아이들은 평생동안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어야 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웃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이들이 받아야 할 고통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해 가슴이 먹먹해진다. 

레닌그라드에 살고있는 보리스는 매일밤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선 얼어버린 강을 따라 식량과 물자를 가득 실은 수십대의 트럭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트럭중 한곳에 아버지가 타고있다. 보리스는 강 밑에서 헤엄치는 괴물을 보았고 얼음 구멍이 생긴 곳에 트럭이 빠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운전하는 트럭이 강에 빠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매번 아버지가 죽는 꿈은 보리스를 괴롭혔다. 전쟁은 보리스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보리스에게 남은 가족은 병든 어머니 뿐이었다. 길어진 전쟁 탓에 음식을 구하기가 어려워 더 말라가는 어머니를 보는게 가슴아프다. 보리스는 어머니가 얼른 낫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건강보단 보리스를 염려해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 시키려고 한다. 이에 보리스는 완강히 거부한다. 자신이 어머니를 지킬수 있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보리스가 없는 어머니는 더 약해지고 아파할것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보리스도 살아갈 힘을 잃을게 뻔했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어제와 똑같은 아침을 맞는 보리스. 폭격으로 인해 도시의 건물은 온전하지 못하고 길거리엔 시체들이 눈에 띈다. 이젠 그리 놀랍지 않은 풍경이다. 죽음이 일상이 된 곳에서 살아가는 보리스에게 가장 중요한건 "오늘은 무 수프에 고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니까. 아픈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먹을것이 간절히 필요했다. 뭐라도 배를 채울수 있는거라면 충분했다. 하지만 오늘도 묽디 묽은 수프 한 그릇 뿐이다. 

실망감에 움츠러든 보리스를 본 친구 나디아가 그를 조용히 부른다. 자신이 감자가 있는곳을 알고있다며 함께 가보지 않겠냐고 한 것이다. 아직도 감자가 있는 곳이 있을까 라는 보리스에게 나디아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어젯밤 죽은 친오빠가 죽기전에 말해준 거라고, 위험한 곳에 있긴 하지만 충분히 모험해볼만한 가치가 있을거라고. 실제로 감자가 있는 곳은 러시아 군과 독일군이 마주하고 있는 땅에 있었다. 어린 두 꼬마 아이들이 숨어서 가기엔 거리도 너무 멀었고 추위도 매서웠다. 자칫하다간 위험해질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위험보단 배고픔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감자는 며칠간 이라도 배고픔을 잊게 해줄거라는 부푼 희망에 아이들은 감자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였을까. 목전을 눈앞에 두고 나디아가 쓰러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적이자 원흉인 독일 군인들이 아이들을 발견한 것이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군인이 되어 독일인들을 무찌르겠다던 보리스는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수없었다. 이 약한 어린 소년은 그저 해코지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 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독일 군인들은 아픈 나디아와 보리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도와주었다.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러시아 진영에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인들도 독일군에게 감사를 표한다. 죄없는 아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줘서 고맙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 중 이었지만 아직 인간애는 남아있었다. 보리스에게 독일군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고 사악한 괴물이었고 아버지를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그들을 보며 생각을 바꾸게 된다. 독일군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음을, 그들도 나처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 임을 알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붙잡힌 독일 군인들에게 러시아 사람들은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럴수가 없었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독일 포로들의 얼굴속에 자신을 도와준 독일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스는 한 독일 포로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주위 사람들은 보리스의 행동에 대해 쑥덕거리고 이해할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증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유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라고. 전쟁이 남긴 상처는 컸지만 증오 보단 용서를 택하는게 자신의 상처를 낫게 해주지 않을까. 보리스가 겪은 놀라운 기적과 행동이 바로 그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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