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을 꿈꾸다 - 우리의 삶에서 상상력이 사라졌을 때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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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을 꿈꾸다>를 만난 건 2016년, 필사를 해보고 싶다는 말에 누군가 이 책 6장을 추천해서였다. 쪽수를 확인하고 놀라서 일단 도서관을 찾기로 마음먹었다가, 책을 소장한 지역 도서관이 딱 한 군데라는 검색 결과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산 넘고 물 건너가면서까지 책을 소중히 모셔올 만한 일이 생겼고, 반납할 무렵 동생에게서 새 책 선물이 왔다. 그때부터 내 잠자리 머리맡 책장에는 언제나 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처음 펼쳐들 때는 고아하다는 문체 이외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책, 그러나 이내 많은 문을 여는 비밀열쇠가 열어준 책, 8년 뒤 새 모습으로 만나게 된 배리 로페즈의 <북극을 꿈꾸다 Arctic Dreams>이다. 


독서는 때로 대단히 사치스런 취미가 될 수 있음을 독립하고 직장에 다니면서야 알았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다 정신을 차리면 밤 11시였고 하루 일과 중 빼먹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재미와 흥미만 좇는 취미생활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나는 세상과 최소한의 연결점만 남겨두고 책 속으로 파고드는 단절감을 좋아했다. 짜투리 시간에 짬짬이 읽는 것으로는 충족 불가능한 길고 긴 몰입. 잘 먹고 잘 자도 해소되지 않는 허기에 지쳐 몇 달을 보낸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다. 한 문장, 한 문단, 한 쪽만 읽어도 전체를 탐독하는 것 같은 감각을 고스란히 되살려주는 책 따로 골라두기. 포식은 못해도 곯지는 않도록. 이 책에는 그런 만나(manna) 같은 문장들이 빼곡하다. 

나는 얼굴에 느껴지던 빛의 감촉을 기억한다. 얼마나 너그러운가. 수세기 동안 이어진 겨울의 증거를 그처럼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땅에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연민이라니. 

'들어가며: 전설만큼이나 먼 땅'


책 내용은 미리보기 전부가 아니라 목차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번 개정판에서는 각 장 제목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듬어졌다.) 글쓴이는 보통 사람이 궁금해할 수 있는 북극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지만, 사진이나 그림 자료는 지도 말고는 싣지 않았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가 만난 북극을 가늠할 수 있다. 북극이라 불리는 장소는 어디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문명인'이 거기를 알기 전부터 머물던 동물들의 생존 방식은 어떠한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존립한 이들을 작가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 땅을 찾아나선 이들은 인류 역사에 무슨 자취를 남겼는지, 지나온 길을 거쳐 내일로 나아가는 길은 어느 방향일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배리 로페즈는 자신이 북극의 이방인이라는 거리감을 잊지 않는다. 북극만의 고유함에 집중하면서, 다름을 쉽게 틀림으로 구분짓지 않으려 분투한다. 그는 북극해 유역의 사향소가 평온한 강인함을 지녔다고 평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야말로 줄곧 그런 태도였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숱한 탐험가들처럼 '척박한 땅'에 깃발을 꽂아 정복했다며 환호하지 않는다. 트로피를 거머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지도 않는다. 다만 눈을 떼지 않고 귀를 닫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어두고 온몸으로 다가간다. 지식이나 개념을 자신만의 언어로 잘 풀어 설명하는 지성 이상으로 돋보이는 관찰자로서의 존중.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장자크 루소가 말하는 진정한 '자연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세부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빈번한 관찰로 익숙해지도록 합시다. 이는 단순한 기억의 노역이 아니라 관찰과 사실에 대한 연구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 자연주의자에게 걸맞은 방식입니다. 

<루소의 식물학 강의> 

바로 배리 로페즈가 북극과 그곳 생명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 아닌가. 이 책은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들을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하지 않고('누구도 이야기 전부를 들려줄 수는 없으므로'), '자신이 마침내 이해한 것을 나누려는 욕망'을 끌어안고 있다.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읽은 책은 그만큼 독자에게 무언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개정판을 손에 쥐고 나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작가는 우리와 북극을 나누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독자들과 무엇을 함께하고 싶은가? 조금 쑥스럽지만, 좋은 책이 누군가의 평범한 나날에 어떤 나이테를 그렸는지 나를 열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름마다 옥수수와 수박과 여름 채소들을 엄청나게 먹어치운다. 여름이 돌아올 때마다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굴면서도 알고 있다. 나보다 훠얼씬 더 키가 큰 옥수수들을 올려다보던 그 덥고 눈부신 밭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이상, 시장에 가든 마트에 들르든 어릴 때 먹었던 그 맛있는 옥수수는 이제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걸. 갓 딴 옥수수를 삶거나 구워내면 얼마나 달콤한 맛이 나는지, 그렇게 금방 따야만 더 맛있는 채소는 뭔지, 무청은 왜 말려서 먹는지, 보석 같은 겨울 열매들 이름이 무엇인지, 향긋한 쑥과 독초 초오는 뭐가 다른지 알려주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배리 로페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내 '마음의 땅'과 한없이 '분리되어 멀어졌다.' 정월대보름에 의식이라도 치르듯 잡곡밥과 견과류를 챙겨도, 매 절기마다 달라지는 날씨를 예민하게 느껴도, 봄꽃들의 개화 시기를 매년 확인하며 일기에 적어넣고 주말마다 숲으로 긴 산책을 나가도,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는 법을 외우고 있어도. 나는 대지와 멀리멀리 떨어진 도시인이라는 걸 해가 갈수록 절감한다. 외할머니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계셨던 '고유한 눈(the native eye)'이 내게는 없다. 내가 땅을 알고, 대지가 나를 기억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서려들던 그때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는 유년과 완전히 작별했다.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였건만 어린 시절이 강제로 떠나가고 있다고 의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몇 년 뒤 집안 어른들이 외갓집과 딸린 땅을 모두 정리하겠다고 결정하신 날 나는 고향마저 상실했다. 상(喪)을 두 번이나 치른 기분으로 새해부터 큰 몸살을 앓으며 <북극을 꿈꾸다>를 찾았던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북극 같아서였다. 현실에서 도망가기 위해 내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땅을 밟았다. 거기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고향을 만날 줄도 모르고. 병가도 못 내고 야근까지 하던 주에 일부러 짬을 내 먼 도서관까지 가 낯선 책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와 새벽마다 그 안으로 달아났다.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이 책이 '땅'을 말할 때 나는 산과 논밭에서 나고 자라 거기서 숨을 거두신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마음의 고향, 삶과 죽음의 풍경, 지금은 닿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충만한 기억, 들판이 쉼터고 놀이터였던 날들. 내 마음속 대지와 북극은 기후부터 생물종까지 닮은 것 하나 없는데도 그렇다. 밤산책 중 절하는 것에 익숙해질 만큼 경이로움을 품었던 그의 감정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향수가 아닌 공경의 마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뿌리고 거둬들이는 땅을 섬기듯 돌보고, 빛과 비를 내려주는 하늘에 경애하듯 감사를 바치셨다. 그런 마음가짐은 곧 내게도 전이되었다. 방학마다 머물던 방은 창이 동향·서향으로 두 개 나 있어서, 해가 돋을 때도 저물 때도 온갖 빛들이 너울거리며 들어와 곁을 채웠다. 세상 어느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부럽지 않은 광채 안에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게 되었었다. 


그 기억 때문에 이전에도 지금도 6장, 그리고 작가가 빛을 다룬 문장들을 가장 좋아한다. 저자는 눈과 얼음의 세계에 떨어지는 '빛'을 몹시 사랑하고 색조에 일어나는 작고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보며 그걸 전달하는 능력까지 탁월하다. 북극의 장엄한 빛과 오로라가 서구 미술사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고 언급하면서 대성당을 신성한 빛의 건축이라 생각했던 유럽 신비주의까지 흘러가는 과정은 또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그가 본 '빛'을 반영했다 싶은 개정판 표지의 풍경도 마음에 들고, 보석 세공처럼 섬세하게 공들인 번역도 여기서 진가를 발휘한다. 원문을 보고 나면 도리어 번역본이 더 귀중하게 여겨질 만큼 아름답다. 역자 신해경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눈부신 구절들. 

- 더 북쪽으로 가자 낙오병들처럼 자기 생각에 골몰한 채 쓸쓸하고 거대한 모습으로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은 빙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추문과 재난이 난무하는 신들의 황혼, 신화의 세계로부터 떠밀려 내려오는 것 같았다. 떨어진 달의 조각들. It was as if they had been borne down from a world of myth, some Götterdämmerung of noise and catastrophe. Fallen pieces of the moon.


- 석양이 질 때 얼음은 태양의 색들을 받아들인다. 장미색, 붉은빛이 도는 갖은 노란색, 물결치는 자주색, 부드러운 분홍색. 얼음은 빛을 반사하는 동시에 수정처럼 맑은 모퉁이와 가장자리에 빛을 가두었고, 빛은 얼음 속에서 더 강해졌다. The ice both reflected the light and trapped it within its crystalline corners and edges, where it intensified.

6장 '얼음과 빛: 공포의 미' 


- 보라색과 짙은 황색 무늬의 석양은 이미 오래전에 기울었다. 하늘은 천천히 흐르는 바다나 별과 별 사이를 흐르는 물결처럼 조용한 파스텔 색조로 흔들리고 있다. 석양의 색은 해돋이의 색이 되었다. 북극의 경계에 내리는 천상의 빛. The violet and saffron streaks of the sunset had long been on the wane. They had gone to pastels, muted, like slow water or interstellar currents, rolling over. They had become the colors of sunrise. The celestial light on an arctic cusp.

'나오며: 영원히 살아 숨 쉬는 땅'


나는 최근 출간된 에세이를 통해서야 저자의 인생에 대해 겨우 알게 되었고, 그저 아름다움에 잘 반응하는 감성을 타고났겠거니 했던 막연한 인식에서도 벗어났다. 푸른 하늘과 강렬한 햇살을 가진 땅에서 자란 소년이 겪어야만 했던 길고 지속적인 학대. 누구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을 때, 아이를 절망에서 건져올린 것은 '무심히 바라본 하늘 한 조각'이었다. 그가 안식을 구한 곳은 홈 스위트 홈도 공동체도 아닌 빛과 물과 새와 나무ㅡ 자연. 아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種) 또한 자신과 동등한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아주 일찍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소유하기보다 나란히, 더불어 살기를 고민하는 어른이 되었다. 배리 로페즈는 섬으로 바다로 초원으로 사막으로 북극으로, 걷고 떠나고 여행하고 탐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매번 처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사람에게서도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이 시대가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우리를 강하게 유혹'해도 사랑하기를 선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번에 다시 6장을 읽었을 때, 잠들지 못하는 밤 나를 어루만지던 그 문장들보다 그걸 쓴 작가를 생각했다. 북극의 빛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를. <해리 포터>에서 덤블도어가 해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너에게 벌어졌던 그 모든 일들을 돌이켜 볼 때,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야말로 너의 가장 특별한 능력'이라고. 

캘리포니아 보이로서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유칼립투스 나뭇잎과 어도비 벽돌집의 옅은 벽면과 출렁이는 수면까지,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 



나 자신은 새 책을 들면 우선 한 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독서가 꽤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발췌독을 많이 권하는 편이다. 다른 인생사와 마찬가지로 독서도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뭐가 됐든 하나만 건지면 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북극을 꿈꾸다>는 어떤 독자든 정말 뭐라도 하나 정도는 크게 받아갈 수 있는 서적이라고 할 만하다. 왜냐하면 한 지역을 소개하기 위해 많은 분야의 학문이 불려나왔으며, 그 모든 것들이 잘 정돈되어 정결한 문체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생물학(생태학)-지리학에 기반을 둔 사실성을 기본으로 하되 신화(민속, 민담), 역사(고고학, 문화인류학), 문학, 미술(상징), 언어 등 다양한 관점으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내는 솜씨는 감탄스러울 정도다. 그저 춥고 황량한 곳이라고 단정짓기 쉬운 공간을, 저자는 사려 깊은 통찰력과 깊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오래 응시한다. 따로 굴러다니기 쉬운 구슬(지식)들을 유려한 실(생명에 대한 폭넓은 감응)로 잘 꿰어놓으면, 아무 상관도 없어보였던 것들조차 실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각 장에도 글 전체에도 충실히 반영되어, 소주제를 다룬 한 장 한 장이 독립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서로 단단하게 연결된 대서사시 같다. 그러므로 이 두껍고 무거운 벽돌책 어디를 먼저 읽어도 좋다. 


가령 나는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조카에게 3장 '북극곰: 통찰하는 방랑자'를 부분부분 읽어주곤 한다. 비행기를 좋아하고 공룡과 포켓몬을 애지중지하며 곰과 판다에 애정을 쏟아붓는 어린 아이에게, 북극곰의 털빛을 묘사한 글귀를 반복해 들려주는 건 즐거운 일이다. <어린왕자>를 얇은 그림책으로만 본 조카지만, 그 애는 이제 북극곰이 가끔 어린왕자의 머리칼처럼 밀밭색을 띤다는 걸 안다. 북극곰 책을 잔뜩 빌려올 때마다 얘는 어떤 색이냐고 물어보는 건 이제 우리 둘만의 놀이가 되었다. 나도 조카도 북극곰을 그저 하얗다고만은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나오는 흰곰을 사랑하는 조카가 좀 더 자라면 금빛 밀밭 같은 에바 캐시디의 'Fields of Gold'를 들려줄 수 있을까?  

제일 밝은 흰색은 봄의 털갈이 때 볼 수 있고, 제일 순수한 흰색은 어린 새끼들에게서 볼 수 있다. 햇빛에 노출되면 털은 미묘한 색을 띤다. 색은 연한 레몬색이나 살구색, 크림색, 밀짚색 등으로 다양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색조가 짙어진다. 햇빛이 거의 없는 가을날 오후에 나이 든 수컷을 보면 털색이 잘 익은 밀 같은 노란 황금색을 띨 것이다. 


광고홍보학과에 다니며 상징과 기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에게는 3장과 4장 '일각고래: 해석 불가능한 코드'를 추천했었다. 코카콜라 광고에 등장하는 폴라베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발표가 끝난 뒤여서 과제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지만, 대신 흥미로운 감상이 길게 돌아왔다. 북극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북극곰에 대해 전방위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내가 한 말이었고, 각기 다른 문화적 특성에 따라 인간들이 북극곰에게 어떤 이미지를 투영해왔는지 읽고 지금 자본이 북극곰을 어떤 '마스코트'로 활용하는지 설명해준 건 그 학생이었다. 우리는 그저 유희로 어미가 보는 앞에서 새끼 두 마리를 쏘아 죽인 인간의 악랄함에 벌컥 화를 내다가, 동석한 지인에게서 새끼를 납치당하고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죽은 원숭이의 중국 고사(故事)를 들었다. 인간은 천적에 대한 방어행동을 연구하겠다고 어미를 잃은 사향소 새끼에게 늑대 사체를 묶어놓고 그 행위를 과학이라 내세웠다. 동물원에서 기를 새끼 사향소를 확보하겠다고 끝끝내 버티는 성체들을 모조리 쏘아죽인 것도 인간이다. 어느 문명이나 인간은 동물을 착취하고는 비천한 타자로 대상화한다. 식물도, 흙도, 토지도, 같은 사람까지도. 밝을 명(明) 자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반대로 숭배한다고 해서 책임이며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환상은 이따금 무지와 다르지 않다. 중세 명화마다 출현하는 신비로운 유니콘이 코뿔소가 잘못 전래된 공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일각고래와도 관련이 있다는 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고결하고 순결한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는 마크,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마다 반복적으로 쓰는 소재(일각수 一角獸), 아이와 여성을 편안하게 느끼고 설탕을 좋아하는 <해리포터>의 신비한 동물, 최근에는 신인 아이돌 ILLIT의 뮤직비디오에 표상으로 나오기도 하는 유니콘. 왜 유니콘이 이토록 상서로운 존재가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꼭 4장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어떤 미술서적보다도 근거가 명확하고 상세한 해설을 들을 수 있는데, 일각고래의 엄니가 유니콘 뿔이라며 비싸게 유통된 이야기까지 가닿으면 원하는 이미지를 멋대로 동물에게 뒤집어씌우는 인간 문화에 실로 복잡한 마음을 품게 된다.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소리를 주고받는 고래가 지적인 동물이라고 확신하면서도 고래를 괴롭게 만드는 수중 소음을 발생시키는 작업에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특정한 주파수 52 헤르츠로만 노래하는 외로운 고래로 많은 사람들이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고, 그 중 <나의 고래를 위하여>는 내가 무척 아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사람과 일각고래가 죽은 이의 피부색과 비슷하다고 시체고래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는 똑같은 종이다. <북극을 꿈꾸다>가 열어준 길을 헤매다 보면 언제나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참고문헌처럼 자세한 데이터 아래 서정적인 서사까지 수놓아서, 여기에 푹 빠지면 무수한 느낌표와 물음표가 폭발한다. 


세계 신화와 종교 강좌를 들었을 때도 이 책이 기억났다. 어느 날 붓다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어느 제자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며 대답했고, 붓다는 바로 그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설파했다. 한 번 들이마신 숨을 다시 내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니, 결국 죽음은 그림자마냥 항시 우리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그래, 지금 이 순간에도. 다음 수업 시간에 나는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의 일부를 낭독했다. 기온이 떨어지고 일조량이 적어져 먹이가 줄어들면, 북극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거나 길을 떠난다. 한 계절 동안만 이동하는 사향소도 있고, 먹이 사냥을 위해 굴을 나서는 늑대처럼 짧게 움직이는 동물도 있다. 이렇게 계절 변화에 따라 새와 동물들이 이동하는 일을 저자는 땅의 호흡에 비유한다. 그들의 대이동은 땅의 숨결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새 터전을 찾아 떠나는 동물들 뒤로 대지가 숨쉬고 있다고 상상한 작가는 붓다와 조금 닮은 것 같단 내 말에, 한 선생님이 그런 상상력은 모든 창세신화에도 비친다고 가르쳐주셨다. 북유럽 신화에서 오딘과 형제들이 거인 이미르를 죽여 새 세상을 만들었다ㅡ 이 흙은 이미르의 살이요, 저 산과 절벽은 이미르의 뼈, 그 바다 또한 이미르의 피와 땀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땅도 호흡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땅도 그러하다. 대지가 영원히 존재할 거라 착각하지만, 땅도 사멸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을 믿는 대신 '심장으로, 머리로, 피부로' 땅의 생기를 느끼고 다른 생명들과 같이 살아야만 한다. 

그곳에 서 있으면 누구나 땅이 차오르는 것을, 햇빛의 영향력 아래 뭔가 실질적인 것이 솟아나는 것을, 그 기꺼운 포옹과 광휘를 느낄 수 있다. 동물들이 오고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땅이 그들을 만나러 부풀어오르고 또 동물들이 떠난 뒤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동을 숨쉬기로, 땅의 호흡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북극의 대지는 봄에 빛과 동물들을 크게 들이마신다. 여름에는 오래 숨을 참는다. 그리고 가을에 숨을 내쉬면서 그 모든 것을 남쪽으로 몰아낸다.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 


이 책이 지닌 탐험기로서의 가치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면 서운하다. 내가 절판된 <아메리고>, <땅끝에서>를 빌려 읽고 <빙하여 안녕>이라든지 <북극에서 얼어붙다> 같은 책들을 주기적으로 찾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다.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보다 조금 더 호흡이 긴 표류기, 원정기, 횡단기, 유랑기 등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8장 '항로: 열정과 탐욕이 얽힌 순수한 욕망' 및 9장 '역사: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펼쳐주고 싶다. 저마다의 욕망을 가진 외지인들이 북극에 이르게 된 항로와 그들이 남긴 '업적'에 대해 논하고 있다. 개인부터 단체, 국가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걸 찾아내고 독점하기 위해 얽히고 설킨 경쟁을 벌이며 반목했다. 우연과 오류, 상처와 시기질투, 의지와 열정, 헌신과 영광으로 점철된 치열함을 거쳐 배리 로페즈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앞에 나열한 어떤 것도 아닌 '존엄과 존중'이다. 인류가 신대륙을 '개척'하고 원(선)주민을 '계몽'할 때마다 없는 것처럼 굴던 그 마음 말이다. 


나는,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부정할 수 없다. 21세기는 역사상 최고로 격렬하게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 이상(理想)의 절반도 쫓아가지 못하는 중이다. 우리는 '모른다'고 인정하기를 너무나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다. 아무리 오래, 많이 배워도 우물 안 개구리이며 그간 한정된 지식과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아는 것만 '일반적 진리'라 규정했다고, 내가 모르거나 공감하지 않는 건 '비정상'으로 감정했다고 수긍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저질러왔다. 서구가 제3세계를, 도시가 주변부를, 부자가 빈자를, 기득권이 소수성을 압박하던 방식 그대로 낯선 곳의 동식물과 사람을 휘두르려 했다. 북극만이 간직하고 있는 특성을 애써 알려 하는 것보다 북극을 황폐한 불모지로 취급하는 것이 더 쉬웠으니까. 눈과 얼음이 그저 '많다'고만 해놓는 게 더 간단하니까(북극에서 눈과 얼음은 동식물들에게 쉴 곳이 되고, 은거할 장소를 제공하고, 온실이며 산실(産室)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진실로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 쪽은 북극이 아니라 교감하기를 잊어버린 우리일지도 모른다. 


먼 도시에 앉아서도 손가락 하나로 극점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류는, 황당하게도 아직 진짜 원시성이 뭔지조차 알지 못한다. 과학에 무지해 이 21세기에도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미개한가, 아니면 굶주림에 시달려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 더 야만적인가? 문명인들은 후자를 보고서도 외면하는 일에 도가 텄다. 그러니 '주변 땅을 옷처럼 두르고 그 땅의 일부가 되려고 노력하기'에 외려 자연에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운 외경심을 가진 에스키모인들을 오해하는 것이다. 순수한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고 감상적으로 동경하거나(그들의 삶에도 악과 태만이 담기고 그들의 생활에도 우리만큼 고통스러운 모순이 지천이거늘), 몰지각하고 무분별하다며 고개를 돌리거나. 지성을 이용해 하는 일이란 자원을 추출하기 위해 북극에 수많은 드릴을 꽂아놓는 것 정도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저자는 끊임없이 염려한다. 땅에서 숫자만을 산출하지 않기를, 땅을 들여다볼 때 거기 깃든 사람들도 잊지 않기를. 계절마다 기후 위기를 실감하고, 매일 누군가 전쟁으로 죽어간다는 서늘한 소식이 들려온다. 인간이 스스로를 가다듬고 살아남을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지금, 우리는 배리 로페즈의 희망 어린 경고를 되새겨야만 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꿈 중 하나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존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바람 중 하나는 그런 존엄을 우리 각자의 꿈으로, 많든 적든 본보기로 삼을 수 있도록 각자의 삶으로 가져오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통의 존엄에는 땅과 땅의 식물들과 동물들이 포함되어야만 한다. 



<북극을 꿈꾸다>로 처음, 아니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참 많다. 우리는 보통 잘 아는 사람의 '앎'을 듣거나,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애정'을 보게 된다. 전문성에는 '사랑'이 결여될 때가 많고 '순정함'은 객관성을 상실하곤 하는데 배리 로페즈는 아는 만큼 사랑하고 공감하는 만큼 제대로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드문 사람이다. 경험하고 기록하는 자로서 그는 우리에게 북극 '공부'를 권유하기보다는 그저 그 고유한 장소를 온몸으로 느껴보며 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안다고 만족하는 순간 오판하기 쉬우니, 눈을 떼지 말고 부단히 바라보며 주의를 잃지 말아달라고. 상상하기를 멈추지 말자고. 북극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대지 위에서 현명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우리의 오래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 우리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한두 개 빠진 걸 제외하고는 솜씨 좋게 묘사를 완료했다는 듯 도표와 목록을 집어넣는다. 그러나 땅은 그림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상을 완성할 수 없다. 

5장 '대이동: 숨결이 길이 될 때' 


- 요컨대 인간이 아무리 조당 리터 단위로 유량을 측정하고 정밀하게 유역이 표시된 지형도를 만들고 수생생물과 조류와 육상 생물 목록을 작성한다 한들, 우리는 강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 살아있는 것들을 위하여> 


- 어떤 식물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찾아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앞에 있는 식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그것을 보는 법부터 가르치도록 합시다. 암기만 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 믿게 해야 합니다. 식물들의 명명법을 앵무새처럼 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루소의 식물학 강의> 


- 무언가를 봤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통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넘쳐난다. 명백한 정보란 우주 안에 찍힌 점 하나에 불과하고, 이 점에 선을 그려넣어 방향성을 부여하고픈 욕망에서 여러 해석이 생겨난다. 

4장 '일각고래: 해석 불가능한 코드'


'움벨트(Umwelt: 생물이 살아가는 환경과 주변세계, 또는 그에 대한 지각)’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날 둘러싼 것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 고민함에 따라 우리는 상호작용할 수도 단절될 수도 있다. 같은 시간을 살고 동일한 공간에 머물러도 외부를 인식하는 마음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배리 로페즈는 온대·열대 기후에 익숙한 우리에게서 선입견이라는 눈가리개를 조심스레 벗겨낸 다음, 지름길(연구로 밝혀진 숫자·통계)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아직 가보지 않은 길(직관과 체험)을 겁내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는 독자가 조금씩 위치를 바꾸어가며 모든 방향에서 북극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도록 돕는다.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목소리에 이끌려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사진 한 장 없는 불친절함에 서운해하기보다 고요히 눈을 감고 상상할 기회를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하게 된다. 다시 눈꺼풀을 열어 실제보다 더 생생한 심상에서 깨어나더라도 쓸쓸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문을 나가면 온 사방이 봄이고 꽃이고 바람이며 별이다. 거리를 초월하여 아주 먼 곳을 꿈꾸게 하는 동시에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더 사랑하게 하던 마법사, 여명과 황혼의 나라로 떠나버린 배리 로페즈에게 봄 안부를 전한다. 


#배리로페즈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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