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일의 엘불리 - 미슐랭★★★, 전 세계 셰프들의 꿈의 레스토랑
리사 아벤드 지음, 서지희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모든 메이저 신용카드로 계산 가능.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점심, 저녁 식사 가능. 가격대는 비싼 편. 로즈 가이드에서는 20점에 17.5점 기록, 미슐랭에서는 계속 1위. 스타일은 모던. 지금은 요리연구소로 변모한 스페인의 레스토랑, 엘 불리.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문객의 모국어로 인사하는 서버가 테이블을 안내해준다. 와인은 선택할 수 있지만, 요리는 선택 불가하며 코스 구성은 50여 종. 한 입, 한 입, 입 안에서는 놀라운 경험이 펼쳐진다. 물론 어떤 레스토랑에서는 명함을 소스에 찍어 먹으라는 서버의 안내에 당황한 적도 있고(명함은 감자 전분으로 만든 것으로, '미각에의 새로운 경험'이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달지 않고 짭짤해서 놀란 적도 있었다. 계란인 줄 알았는데 캐러멜 소스를 입힌 아이스크림과 마멀레이드여서(노른자 깨진 것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후문) 재미있었던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귀, 눈, 코, 손끝, 입술, 혀끝.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다다르는 새로운 경험. 음식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음식에 대한 경험이 없을 수는 없다. 엘 불리는 '평범한' 단순한' '상상할 수 있는' '상식적인' 모든 선을 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없는 그 한 자락이 여기 이렇게 리사 아벤트의 취재로 드러났다.


 


 

엘 불리를 이끌었던 페란 아드리아는 돌가루도 흥미롭다면 요리 재료에 활용했을 인물이다. 거리낌이 없고 막힘도 없다. 단,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라 해도 모든 모방은 진부하다. 정작 반응은 시들했지만 페란 자신이 시즌 동안 좋아했던 요리 중 하나가 장미꽃잎 아티초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에 굶주린 사람이다. 천성이 직관이고 창조가 직책이다. 아이스크림은 왜 달콤해야 하는가? '적당히'는 없다. '어머니의 손맛'은 그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분자요리라는 명칭을 정작 페란은 싫어한다지만 로마 시대에서 출발한 그 개념을 현대에 들어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가 바로 페란 아드리아이다.

 

 

 

 그렇다면 분자요리란 무엇일까. 그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철저하게 분석, 연구한다는 개념에서 붙여진 이름인데, 재료의 질감, 조직, 화학, 물리 작용까지 분석하여 변형하거나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바로 분자요리이다. 두산 백과에서 찾아보니 올리브 오일도 액화 질소로 순간냉각을 거쳐 아이스크림으로 만들면 전혀 다른 새로운 맛과 질감이 생겨난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는 송아지, 돼지, 양, 닭을 마트료쉬카 처럼 만들어 서빙했고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천연재료를 고무, 껌 등과 같은 비천연적인 재료로 융합하여 케이크를 산처럼 쌓아올리는 세트피스를 활용했다고 한다. 어떠한 법칙도 근거가 필요한 법. 본격적인 분자요리는 물리, 화학과 함께 등장했다. 라부아지에의 맑은 육수,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 마이야르의 마이야르 반응. 이들이 소개한 것은 음식의 화학 작용과 반응이었다. 마이야르 반응만 하더라도 고기를 구우면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이 고온에서 결합, 아로마 분자를 발생시킨다는 학설이다. 생화학과 물리, 분자생물학은 그 미세한 부분을 파헤쳐 새로운 길을 연다. 1988년에는 에르베 티스(프랑스, 화학자)와 니콜라스 커티(헝가리, 물리학자)는 시칠리아에서 요리를 물리, 화학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심포지엄을 갖는데 여기서 바로 분자물리학 요리, 즉 분자요리가 그 이름을 갖게 된다. 요리에 대한 사랑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이들은 계량하고 관찰하고 분석한다. 이론과 관찰, 분석과 집중을 요구하는 현대의 새로운 요리의 절반은 이 심포지엄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칙과 고집. 경험과 상상. 패기와 열정. 끈기와 노력. 짝으로 이루어서 더 완전해지는 조합이 있다. 엘 불리는 이 모든 조합을 그러모아 창조를 하는 요리 연구실이었다. 레스토랑을 들어서는 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일깨워준다. 모든 것이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어도 엘 불리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살아있다면 먹어야 하고 먹어야 한다면 새로워야 한다.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은 실은 태초의 도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화학과 물리. 상상력과 직관. 페란 아드리아의 레스토랑 엘 불리에서는 음식이 새로운 경험이 된다. 요리는 낯선 곳으로 가는 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180일간의 중노동과 엄격한 규율이다.

 

 


 

 엘 불리는 일 년 중 180일만 문을 연다. 매년 실습생을 바꾸는데, 그들은 모두 무보수로 일한다. 케모, 케모를 외치며 군대와도 같은 엄격한 곳에서 180일을. 별 다섯짜리 주방에서 일하던 이도 있고 생화학 석사도 있다. 엘 불리 앞에서 텐트를 치고 뽑아달라고 애원하여 들어간 이도 있다. 그리하여 모인 이들이 하는 일은 토끼 귀 손질하기, 장미꽃잎을 데쳐서 아티초크 모양으로 만들기. 말미잘 촉수 제거하기. 우유에서 굳은 우유 단백질을 걷어내기(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걸로 요리를 한다). 옥수수 다듬기. 손상 없이 굴 껍데기 까기. '자, 이제 창조를 시작할 거야'라는 페란의 말에 모두가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물론 그중 아주 극소수만 채택되거나 변형된다. 

 그리하여 나오는 메뉴는 다섯 시간에 걸쳐 오십여 가지로 나뉘어 서빙한다. 칵테일은 우메보시와 소금으로 만든다. 크림에 버섯을 3밀리가량 두께로 썰어 붙여 민트와 함께 서빙한다. 안초비는 요구르트와 함께 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든 조합이 엘 불리에서는 가능하다. 물론 이 메뉴는 늘 다르고 늘 변한다. 같은 것은 없다. 

 


 

 

 주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뛰지 말 것. 두 번 이상 지각하면 곧장 해고. 요리 맛은 이미 다 정해진 것이니 테이스팅 스푼은 필요 없다. 맛도 볼 필요 없다.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것이므로. 메뉴는 분과 초 단위로 정확히 시간을 지켜 조리한 다음 서빙할 것. 청결히, 효율적으로, 빨리! 그래서 리사 아벤드의 시선을 빌어 엿본 엘 불리에서는 쉴 새 없이 '케모, 케모' 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본래의 스페인어와는 다른 의미로 케모는 주의, 비켜주세요, 뒤에 사람 지나가요, 서빙중입니다, 빨리, 빨리. 등등 모든 의미가 된다. 효율성의 극대화. 주관의 배제. 엄격, 깐깐함. 매와 같은 시선. 아, 나는 주방이 이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에서는 페이스트리 담당이 전날 마약과 술에 찌들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대신 누군가 반죽을 해야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제이미 올리버의 학교급식 개혁 다큐멘터리에서는 주방 직원을 놀렸다가 학교 강당을 가로질러 도망가는 스타 세프 제이미 올리버가 등장했다.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에서 고든 램지는 끊임없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했다. 그 모든 케이스를 '요리사들은 개성적이다'라는 명제 아래 다루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각자 개성의 표출, 작업의 방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페란의 주방은 공기가 가라앉고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실험의 공간이었다. 뉴욕 타임즈니까 특별히 2년만 기다리게 해주겠다든지, 자기 자신조차 모방하지 말라는 페란 아드리아의 말은, 그의 특징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옳다. 같은 라비올리를 만든다 하더라도 제이미 올리버와 고든 램지, 앤서니 보뎅과 페란 아드리아의 라비올리는 제각각 다를 것이며 개성과 구조, 아이디어와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런 각자의 스타일이 신선하게 와 닿는다. 우리는 이것을 요리라고 부르고, 미식이라고 하지만 끼니를 넘어선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모든 개성은 훗날 한 줄기를 이룰 것이다. 

 





메뉴란 한 편의 영화와 같아서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일 년 후 나를 다시 찾은 이에게 같은 영화를 보라고 할 수는 없다. 

-페란 아드리아

 


 



주방을 이야기하는 리사 아벤드의 시선에는 환상도 과장도 없다. 말없이 보고 과장없이 전한다. 엘 불리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에도 억눌리지 않는다. 페란 아드리아의 카리스마에도 억눌리지 않는다. 서른 명 실습생의 이야기를 다룸에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과장과 거짓이 없는 시선은 그 자체로 충직한 무기이다. 요리에 대한 애정과 결핍을 일부러 꾸미지 않는 그녀의 시선을 글로 읽다 보면 사진이 거의 없는 이 책이 전혀 아쉽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이다.


 

 





-영화 '엘 불리'의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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