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여자와 아이의 얼굴. 여자의 정면과 아이의 옆 얼굴. 이 얼굴과 이 눈빛을 넘어서 책 표지의 날개를 들추어 보면 미국(그럼 그렇지), 오렌지 상 수상작, 월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가디언, 저널리스트, 옥스팜, 나이로비, 방콕, 이런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널리스트와 소설가를 병행하는 사람의 글이라. 현재까지 10여 편의 소설을 썼고 예술학을 공부했다 한다. 



 이런 단어의 조합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적어도 맞춤법은 안 틀릴 것이다(저널리스트 후광효과). 감성의 근거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예술학). 이방인이자 현지인일 것이다(나이로비, 방콕, 미국), 여성문학의 무언가를 보여줄지도 모른다(오렌지 상 수상). 해리엇 헤이스팅스가 디렉터로 있는 오렌지 상은 해마다 다섯 명의 여성 비평가 패널이 영국 내 출판물 중 여성 작가의 픽션 중 한 편을 선정하곤 한다. 최근에는 2009년 맨부커 상 수상작가인 Byatt와 마찰이 있었으나 여전히 '우리는 오렌지상이 여성 작가의 픽션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러한 기대에 걸맞게 상대주의와 인류학, 모성과 부성, 부모와 자식, 액션과 리액션, 신호의 전달과 수신에 대한 한글 번역본으로는 육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이 바로 이것. 틸다 스윈턴 주연의 영화로 작년 개봉(한국에는 올해 팔월 개봉)하기도 했다.




 이것은 모든 어머니의 악몽이다. 책에서 관찰한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에바는 결코 아이를 환영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는 네가 없었을 때 더 행복했어!'라고 여섯 살이 된 케빈의 기저귀를 갈며(그때까지 대소변을 가리지 않았다) 소리쳤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이를 사랑하기가 어려웠다.

사랑할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



 에바의 행동은 케빈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케빈의 반응은 에바의 감정을 건드린다. 두 사람은 그리하여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채 서로에게 익숙해져 간다.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포기했고 사랑받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멈추었다. 그러나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끝내 이것을 모성에 관한 이야기만으로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즉 에바 캇차두리안은 동정만 하기에는 복잡한 사람이다. 케빈은 사람을 학교에 가두어 놓고 석궁으로 하나씩 쏘아죽인 다음 제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이지만 에바만은 죽이지 않는다. 왜 그랬냐는 말에는 '이전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다.'라고 답한다. 이 모든 행동은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이다. 그것이 꼭 사랑의 감정은 아닐지라도, 어찌되었든 그것은 강렬한 신호이다. 나 여기 있어요. 여기에. 




"넌 안 그래?" 내가 물었어. "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애가 어깨를 으쓱하더군. "당신은 안전하고 건전한 곳으로 피했잖아, 안 그래? 하나도 긁히지 않고."

 "내가?" 내가 물었어. "그럼 어째서 난 죽이지 않은거지?"

 "진짜 공연에선 관객한테 활을 쏘지 않으니까." 그 애가 술술 말을 꺼냈어. 오른손에 뭔가를 돌리면서.

 "날 죽이지 않은 게 최고의 복수란 말이니?" 이미 우린 무엇을 위한 복수인가라는 주제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어.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네가 싫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빛.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발걸음. '디 오레고니언'은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고, 또 자식을 선택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 책을 선택할 수는 있다.'라고 이 작품에 헌사를 보냈다. 옳은 말이다. 어머니 없이 태어나는 자가 없다고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죽도록 사랑받고 싶어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그루누이에게도 어머니는 있었다. 그 대상이 눈에 보이든 모이지 않든, 한때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있음을 통해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게 뭐야?" 내가 물었지. "뭘 갖고 있는 거야?"

 살짝 교활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애가 손바닥을 펼쳐 부적을 보여줬어.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구슬들을 수줍지만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처럼. 내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바닥에 덜커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지. 어떤 물체를 볼 때 그것 역시 날 보고 있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다신 꺼내지 마." 내가 목쉰 소리로 말했어. "그럼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내 말 듣고 있어?" 




 '너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여동생에게 화장실 세제를 부어 얼굴을 태워버리고, 학교 선생님의 경력을 끝장내고, 석궁으로 사람을 죽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당신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

 네가 없었을 때 난 더 행복했다고 말하고 제때 보내는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본위로 해석하고 모든 걸 아는 눈으로 꿰뚫어보고 언제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엄마의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




 물론 서로는 서로에게 아무 것도, 아무리 보아도 잘못한 것이 없다. 단지 에바는 에바대로, 케빈은 케빈대로 가장 자신에게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있을 뿐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케빈의 행동은 어떤 마음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물론 그는 반사회성 인격장애자이기는 하지만 그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늘 에바였다. 사건사고가 있으면 그곳으로 늘 에바가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꿰뚫어본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그의 얼굴조차 알지 못했다. 어긋나는 관계의 핵심은 이것이다. '너 그거 했지?','너 그런 마음이지?' 라고 단정 짓는 것.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단정 짓기는 늘 위험하다. 틀렸을 때에도 맞추었을 때에도 그 행동 자체가 관계의 종말을 불러일으킨다. 그 후 아무리 `아니야,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괜찮아. 알 것 같아.'라고 말한들 무엇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미 부정은 긍정의 모든 속내를 꿰뚫어버렸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걸 그애도 알았던 것 같아. 내 말은 그 애한테 표면상 지독하게 성가신 '아줌마'의 방문을 떼어낼 수 있는 부적을 제공한 셈이었는데, 그날 이후 셀리아의 유리 눈이 내 눈 앞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게 된 건 내 생각에,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온다 걸 그 애가 좋아한다는 의미로밖에 해석할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옹졸하고 비겁한 일이다. 에바 캇차두리안의 모든 행동은 그런 의미에서 빈틈을 자주 보인다. 이것은 모성이야말로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에게 지쳐서 욕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이는 그저 가장 그 아이 자신답게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수백 번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엄마가 욕을 하면 그것은 아동학대가 된다. 뚱뚱해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걸 두려워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 모든 사람이 타인을 위해 이렇게 헌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해야만 정상인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게 되었나. 




 에바 캇차두리안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지느냐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이유가 중요한 일이 타인에게는 결과가 중요한 일로 탈바꿈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는 중요하지도 않다고 스스로 말한다. ('내가 발견했던 내 모성애에 대한 대중의 옹호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으니까. 설사 있다 해도 그건 날 화나게 만들 뿐이었지."-609 페이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머릿속 내재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필터를 거쳐 보는 케빈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육백여 페이지에 걸쳐 읽었으나 케빈이 아닌 에바 캇차두리안의 아들이 그녀의 어떤 행동에 고마워할지조차 의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에바의 머릿속에 있는 불문율이었다. 손을 뻗어 겨우 닿을 것 같은 옷자락을 여미며 가는 듯한 케빈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아주 조금은, 추측할 수도 있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태초부터 지속하여 온 적대감은 그녀의 마음의 모든 평화를 깨뜨린다. 이때 독자는 '왜'냐고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라고 물어야 옳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A는 B이다.' 라는 식의 단정을 피한다.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로 감정과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생각을 흔들리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호흡을 끊어놓는다. '케빈에 대하여'는 앞서 말하였듯이 어머니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튼튼한 관계의 견고한 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직 모성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엄마가 아이를 어떤 방식으로 키웠다.

엄마가 아이를 이렇게 길렀다.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자랐다.



 결국,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이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신체를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는 듯하지만 사실 저 말에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여전히 모든 정신의학자가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땠는가'는 이런 슬픈 사실을 담고 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이를 담는 그릇일 뿐이니까. 




 몰락과 화해, 가능성의 이야기. 부엌에서 아이의 간식을 만들었는데 '난 피망 안먹어'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에바 캇차두리안의 이야기. 어긋난 대화의 원류를 바로잡으려 무척 힘겹게 강 위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독자는 결국 이 엇갈리는 소통에서 구토와 복통,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날씨를 겪고 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고 드라마틱하다. 케빈 그 자신과도 같이 그 사건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할 말을 잃게 되고 모든 희망과 절망이 스며든다. 이 상실감은 결국 상대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케빈에 관해 이야기해 보아야만 한다. 이것은 자신이 가장 마주치기 두려운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 자신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자신과도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다른 모르는 사람. 그 모습을 직시할 때에야 화해는 가능할 것이다. 

 

 

 

화해를 하고 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있을까. 모를 수 있을까. 그들은 그렇게 속삭였다.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이지만 케빈이 없는 에바는 있을 수 없고 에바가 없는 케빈은 있을 수 없다. 아이 없는 엄마가 있을 수 없고 엄마 없는 아이가 있을 수 없듯 두 사람은 서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췌:케빈에 대하여 602~60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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