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전
홍상수 감독, 김상경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나무가 없는 곳에 살아야만 해요 바람이 불면 나무들이 울부짖어요 여긴 언제나 줄곧 바람이 불죠 1년에 이틀을 빼놓곤 말이에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래요 떠나가겠어요 여기 머물지 않겠어요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바닷가에 죽어 있는 새들은 거의 다 바다새들이죠 폭풍우가 그치면 나무는 더이상 울지 않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꽥꽥 비명을 지르는 새소리가 해변에서 들려와요 아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전 아니에요 떠나가겠어요"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중에서.


홍상수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일기를 쓰는 일과도 같습니다. 돌아보고, 돌이키고, 후회하고, 허탈해하고, 연결을 찾고, 매듭은 끊고, 벗어날 듯 하면서도 회귀하는 그런 일이 있어요. 그것을 일상이라고 부르고, 낭비하다 보면 마침내는 버나드 쇼 처럼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런 묘비명을 가지게 되는 일. 홍상수의 영화가 늘 그러했듯 여자들은 남자들이 기다리면 앞서 걸어가 버리고 좋아하게 되면 발작처럼 울게 되고 잡힐라 치면 떠납니다. 포스터의 동수와 영실의 모습을 보세요. 저보다도 중요한 구도는, 영화를 보고 나온 상원이 영실의 뒤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꼭 사람이 화면 밖으로 걸어나올 듯한 장면. 저는 이것을 차라리 입체 영상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장면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질문들은 답이 되어 돌아오고, 그 시기는 제각각 엇갈려요. 이것은 같은 말을 영어로 옮겼다가 그 영어를 다시 한글로 옮기면 영 생경스런 말이 되어 돌아오는 그런 그림자 놀이 같은 현상입니다. 확실히 홍상수는 구조를 허물고, 장면을 재생하고, 영화를 씬 단위로 찍고, 관계를 이었다가 다시 끊어버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시소처럼 오르락 내리락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에 능력이 있는 감독이 분명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들이 반복되고, 확대되고,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가, 죽어버리고, 살아납니다. 이것은 눈과 마음, 마음과 눈, 생각하는 손과 저절로 일하는 머리를 보는 일. 

어떤 영화는 끊이지 않고 몰입을 요구하고, 어떤 영화는 반면 빠져들라 치면 계속 호흡을 뚝뚝 끊어 의식을 몰아냅니다. 헐리우드의 영화들이 대부분 첫번째 전략을 택했다면, 헐리우드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을 전후로 하여 끊임없이 두번째 전략을 택해왔지요. 홍상수의 영화를 굳이 분류하자면 두번째의 부류입니다. 뿐만 아니라 홍상수는 그 어떤 답도 주질 않습니다. 가령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습관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남자가 주인공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이 남자는 영화 속의 영화에 등장하는 상원의 형입니다. 그는 '인제 또 일 년 고생해야 겠구나' 라는 말을 상원에게 합니다. 저 나이의 청년이 일 년 간 할 고생. 아마도 재수를 하려나. 생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일요일날 엄마 집에서 보자'입니다. 엄마 집이라니, 그럼 아빠 집도 있나. 여기까지는, '아마도 형이 따로 나와 사나 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상원을 구해주는 남자에게 상원은 '이제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되는지를 묻습니다. 아, 엄마와 좋아하는 사이구나. 싶은데 그러나, 엄마는 그 아저씨더러 '니가 뭘 안다고 그러니, 뭘 알어?'라고 말합니다. 아저씨라고 쓰고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삼촌인데 아버지 같은 존재인가. 게다가 '어머니'라고 부르며 야단을 맞다가 상원이 옥상에 올라가 외치는 단어는 '엄마'입니다. 이건 마치, 계모에게 야단맞고 우는 신데렐라 아닙니까. 요정이 나타나려면 멀고도 멀었습니다. 이 이상한 가족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동굴인 극장에서 나왔던 영화였고 관객은 영화 속 '이형수'의 영화를 본 것 뿐이니까요.

한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한없이 단정한 여자가 소주 한 잔에 잠시 흐트러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포스터에는 '여배우를 만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영화 속 영화에서 나와, 밖으로 나와 봅시다) 여배우 영실이 동수에게 '여배우라고 해서 특별한 거 아니에요, 아셨죠? 여배우도 똑같은 여자에요' 라는 말은, 저 광고 문구에 대한 회답일까요. 그것은 차라리, 끊임없이 치근덕대던 동수가 여배우 영실에게서 여배우의 크레마를 뽑아내어, 이상형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화답일 것입니다. 답이 있기는 한데, 조금씩 느리고 느슨하게 이 영화 속에서는 반복됩니다. '말보로 레드 주세요'라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양담배 안팔아요'라는 말이 들립니다. 이것은 '엄마 집에서 보자' 만큼이나 기묘합니다. 요즘 누가 저 말을 하나요? 또한 이형수의 영화에서는 영실이 상원에게 '너 내가 첩 해줄까?'라고 말합니다. 요즘 누가 저 단어를 씁니까? 죽어가는 이형수를 만나고 나온 동수는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생각을 해야 해'라고 이 영화 속에서 최초의 나레이션을 합니다. 그는 그리고 그 때 혼자 있습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자신의 앞에 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말들은 이상하게 메아리칩니다. 

영화 속 영화, 즉,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은 말보레 레드를 사려다 88을 삽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소설 속에 총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발사되어야 할진대 상원은 담배를 피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상원이 사려 했던 말보로 레드를 손에 넣는 것은 영화를 보고 나온 동수입니다.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은 '깨끗이 죽자'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어, 죽어버리고 싶어. 죽는다는 이야기가 어찌나 강렬하게 나오는지요. 그 말들을 듣고 뭔가 기기묘묘하다, 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영화 밖의 영실의 대사로 다시 이유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녀는 상원에게 '좋고 싶어'라고 말하지요. 사실 이 말은 워낙에 희미하고 얼버무려져 있어 심지어 '여배우의 발성이 엉망이다'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실은 이 말은 저도, 당신도, 심지어는 영화 속 동수 조차도 못알아들으니 의도적인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좋고 싶어, 좋게 해줘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의 의도적인 흐트러트림일 것입니다.그런데, 이 의도적인 흐트러트림 앞에서, 상원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마침내는 가장 슬픈 말이 되고 말지요.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나온 한 마디, '내가 너, 첩 해줄까?' 이 말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이야기 하여도, 영화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부른 노래들 속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무한대로 증폭됩니다. 그 거리는 아무리 하여도 좁혀지지를 않을 것입니다. 

생활과 이벤트는 다른 것입니다. 전자가 계속 흘러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끊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배가 아프다고 주저앉는 여자는 곧 영화 속에서 섹스에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보아도 됩니다. 문제는 지속성에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실패하던 상원, 영화 밖에서 실패하지 않는 동수)자판기에 넣은 동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영실은 모르고 관객들은 압니다. 상원이 죽기 전에 쓰겠다는 공책에 무엇을 썼는지, 상원은 알고 관객은 모릅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블루, 레드, 화이트에는 힘겹게 휴지통에 유리병을 넣는 할머니가 나오지요. 블루에서는 안간힘을 쓰다 넣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제 딸꾹질을 해 봐' 라는 이야기와, 그것과는 아무 연관 없이 일어나는 사고가 이야기의 첫 출발이 됩니다. 우연히 남산타워가 눈에 들어오고, 그 우연을 시작으로 여배우를 쫓고, 어쩌다 보니그녀와 잠을 자게 되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저는, 들었다고 하지 않고 보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자가 찾던 것은 여자에게는 없는 여배우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서 인용한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저 독백에는 의도적으로 마침표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모두 말로 되어 있는 스러짐의 연대기이니까요. 지금 던진 질문의 답이 언제 돌아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수가 끊임없이 여배우 영실의 뒤를 쫓는 것. 그런데 마침내는 그녀가 먼저 떠나게 되는 것. 그것은, 덧셈과 뺄셈의 이상한 만남과 헤어짐입니다. 그 사이를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 홍상수의 죽음에의 열망은(기이할 정도로 두려워한다는 것을 열망이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살기 위해 헤어지고, 살기 위해 생각하고, 살기 위해 맴돌고, 말로 시작하여 말로 끝나는 모든 데자뷰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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