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대명제국 중국의 역사
데라다 다카노부 지음, 서인범 옮김 / 혜안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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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샤에서 발행한 중국의 역사 시리즈 중 명조 부분만 번역하여 내놓은 책이다. 이 책 외에도 혜안에서는 중국의 역사 시리즈를 번역해서 출판하고 있다. 중국사라고 하면 진순신의 이야기 중국사,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동양문화사 등등의 책들이 집에 있다.


내가 명나라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라고는 주원장이 창업하였고 북로남왜를 걱정하여야 했으며 마테오 리치가 선교활동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 출병하여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는 성장하는 여진족을 견제하지 못하여 멸망하게된 왕조라는 정도였다. 명나라 창업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지인 의천도룡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난다. 중학교 사회 시간에는 이갑제, 일조편법, 양명학 등등의 단어들도 외워야 했던 기억이 난다.


명나라 역사를 황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홍무제 - 원말은 궁정의 내분과 정치 부패에서 기인한 사회불안, 계속된 천재, 화폐의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반란이 들끓었다. 백련교도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홍건적 세력이 있었다. 이들 세력 중 하나인 주원장이 원조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다른 반란군 세력을 제압하여 명조를 창업하였다. 주원장의 반란군은 초기에는 농민반란군이었으나 갈수록 지주계급적 성격을 띠었다. 원명교체를 역성혁명이라고 바라보았다. 제국을 이룬 후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려 노력했다. 개간을 장려하고 지주를 탄압했다. 토지측량을 하고 인구조사를 하였다. 이갑제를 바탕으로 세금을 걷었다. 호유용의 옥, 남옥의 옥으로 건국공신들을 숙청하고 독재 권력을 강화했다. 


건문제 - 홍무제의 황태손으로 홍무제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숙부였던 연왕 영락제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자살한다. 조카와 숙부 사위의 전쟁을 정난의 변이라 한다.


성조 영락제 -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강남지방과 수도인 남경의 여론이 혹독하여, 원래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천도한다. 이로써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가 서로 분리되고, 물자의 보급을 위해 대운하를 정비한다. 다섯차례에 걸친 대몽고 출정을 감행한다. 이를 막북친정이라 한다. 정화의 남해 원정을 지시한다. 나침반과 항해도를 사용하는 진보된 항해술을 사용했다. 정화의 노력으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이 빠른 속도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에 화교의 진출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30여 국에 달하는 조공국을 거느렸다. 환관을 중용했다.


인종 홍희제 - 제위 8개월 만에 사망.


선종 선덕제 - 태평의 천자. 제 2의 정난의 변을 토벌한다. 명 제국은 창업의 시대를 넘어 수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고 몽골방위선을 후퇴시키는 등 성조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은 자취를 감추었다. 정치체제를 중심으로 통상적인 한민족국가로의 변환이 시작되었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히 여기는 중국 전통 왕조의 본래 체제로 복귀하면서 문관 재상제를 부활시켰다. 


영종 정통제, 천순제 - 명군은 몽골기병의 공격을 받고 각지에서 패배를 계속했는데 정통제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황제 친히 진군하였다가 토목보에서 몽골기병의 급습을 받아 전멸당하고 포로로 잡힌다. 황제가 포로로 잡히자 명에서는 경태제가 즉위하였는데, 영종이 석방되면서 그의 복벽을 꾀하는 세력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켜 다시 제위를 차지한다. 도시에서는 화폐로 은이 널리 사용되었고, 생산의 향상에 따른 쌀값 하락으로 인해 현물로 녹을 받던 관리들이 봉급을 은으로 받기를 원하게 된다. 항조투쟁인 등무칠의 난이 일어난다. 


헌종 성화제 - 세금의 은납화로 인한 화폐경제가 농촌으로 침투하고 농민들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부업적 가내공업으로 상품작물을 생산하게 된다. 영종 말년, 헌종 효종 시대에 걸쳐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대몽고 정책이 축소되어 100년에 걸쳐 만리장성 수축이 시작된다. 대외적으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


효종 홍치제 - 중흥의 영주. 각료를 일신하고 관료들과 협의하는 정치를 부활시켰다. 행정법규를 집대성하여 대명회전을 펴냈다.


무종 정덕제 - 정치는 하지 않고 문란하게 놀기만 했다. 반란이 일어났으나 왕양명이 평정한다. 무종 때에는 유근이라는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왕양명은 그에 반대하다 귀주 용장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돈오각성하여 심즉리설을 만들었다. 유근이 실각하자 복귀하여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의 학설은 치양지설로 발전하였다.

세종 가정제 - 북로남왜가 기승을 부렸다.

목종 융경제 - 토지의 집중화가 진행되고 대지주가 출현하여 농민들은 소작인이 되어 심한 수탈을 받았다.

신종 만력제 - 재상 장거정이 내외의 현안을 처리하였다.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일조편법을 실시하였다. 일조편법이란 부역의 할당과 징수를 한 조목으로 만들어 부역제도의 간소화 능률화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다. 이갑제는 폐기되었다. 만력 삼대정벌이 있었다. 보바이의 반란, 조선출병, 양응룡의 난이 그것이다. 쇠약해져 가고 있던 명의 국력이 한층 더 소모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명조 재정이 파국에 치달았다. 마테오 리치가 상륙하여 서양문물을 소개했다. 

광종 태창제 - 재위한지 1개월만에 붉은 환약을 먹고 사망.

희종 천계제 - 동림당과 반동림파의 싸움이 심했다.

의종 숭정제 - 도시와 농촌에서 반세 반조 반권력의 실력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제국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동시에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동시에 국내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반란군 중 가장 유력한 자가 이자성이었다.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하였고 명 왕조는 멸망했다. 그리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나라에 붙어 이자성을 치고, 청군이 북경에 입성하여 대청제국을 세웠다.


농민반란, 화폐경제의 활성화, 상품작물의 재배, 조공국과의 교류, 서양과의 무역, 서양문물, 양명학 등 수많은 사건들이 각종 정치적 사건들과 함께 어울려 생겼다. 한 왕조의 역사는 왕위계승문제, 대외관계와 전쟁, 세금걷는 문제, 그 속에서 자라나는 일반 서민들의 문화 등등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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