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거리의화가의 서재 (거리의화가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4 May 2026 06:05:53 +0900</lastBuildDate><image><title>거리의화가</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155161733379275.jpg</url><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거리의화가</description></image><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 -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 - 지역사·외부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5219</link><pubDate>Fri, 08 May 2026 21: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52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7905&TPaperId=172652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off/k50213790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7905&TPaperId=172652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 - 지역사·외부 역사</a><br/>모리스 로사비 외 지음, 미할 비란 외 엮음, 김석환 옮김 / 사계절 / 2026년 04월<br/></td></tr></table><br/>1235년 카라코룸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무렵,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만주, 북중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 및 점령했고 고려로도 진출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추가로 서방 원정을 계획했고, 이 원정은 러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약탈하기보다 이곳을 통치할 행정 중심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수도 건설은 몽골이 약탈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 본토는 여전히 이동하는 목축민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 P16<br><br>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시리즈 마지막에 왔다. 시리즈를 구입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3권이기 때문에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3권의 내용은 몽골 제국에 흡수되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통치된 지역과 당시 관계를 가진 지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당 시기 특정 지역에 어떤 국가가 세워지고 무너졌는지, 그리고 몽골이 행한 통치 방식은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br><br>우구데이는 제국 관리를 위해 카라코룸에 수도를 건설했으나, 이후 자연재해로 인한 환경적 요인, 카안을 둘러싼 권력 투쟁 등 내부 갈등으로 그가 다스리던 몽골 지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다이 가문 간 충돌의 결과로 원 조정은 1307년 몽골 지역의 군인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새로운 행정기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관료 기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초원을 통치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유목민 가구와 집단은 광활한 몽골지역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청(淸, 1644~1911)과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가축의 집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도 목축민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몇몇 작은 마을들과 주변 지역, 그리고 거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앞으로 설명할 정책들을 따랐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게다가 조정에 있는 몽골인들은 원래 초원 출신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정주 세계에 거주했고 일부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목민 사촌들과 연결이 끊겼고, 관심사와 정책 선호도도 달랐다. 이 몽골인들과 원 조정의 중국인 관료들이 고안한 행정기구가 과연 초원에서 효율적이었는지 여부를 규명하기는 어렵다(P34~35). <br><br>이후 권력을 잡은 쿠빌라이 카안은 원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주둔군을 배치하는 대신 관료와 군인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등 떡밥을 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었고 관리는 부패했다. 거기에 경제적 불안정이 더해지면서 막판에는 통치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러 몽골 집단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다. 그 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귀환한 몽골인과 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피난민은 그 정확한 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새로운 집단은 목초지, 물, 가축 무리를 놓고 거주민과 경쟁했다. 따라서 식량과 필수품이 부족해졌다. 1388년까지 계속된 명의 공격으로 사태가 더욱 심해졌는데, 카라코룸에 위치한 보급 본부뿐만 아니라 토지도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어진 명조의 무역 제한으로 몽골은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침략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은 분열 상태였다. 서몽골 집단 중 하나이자 몽골의 혼인 동맹이었던 오이라트가 칭기스 가문과 이른바 동몽골에 도전했다. 그들이 아릭 부케의 후손들과 손을 잡으면서 북원이 중국에 대한 권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P44). <br><br>고려와 칭기스계 관계의 다른 측면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30년(1231~1259) 가까운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 끝난 뒤 고려 황실은 1274년에 칭기스 가문 황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한 세기 동안 지속됐다. 칭기스계는 일부 초기 동맹 세력 및 지방 군주(콩기라트와 위구르 등)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몇몇 정치체(금, 남송, 맘룩)와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상호작용이 이처럼 눈에 띄게 결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칭기스계의 방벽이 됐고, 1380년대에는 정통성을 갖춘 국가로서 칭기스계의 지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였다. - P51<br>이후에도 1380년대 내내 고려는 가문, 외교, 군사 이해, 공동의 역사 등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원과 얽혀 있었다. 요동은 많은 고려 이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또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 왕조의 설립에 참여한 많은 주요 관료, 군인, 지식인이 몽골 치하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중요도를 가진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몽골 통치 시기 한반도는 중국을 넘어 유라시아 지역까지 더 넓은 네트워크에 연결되면서 많은 문화적 교류가 일어났다. <br><br>몽골은 1220년 코카서스 지역을 정복한 뒤 셋으로 나눠 노얀(지휘관)에게 분배하여 제국의 통제하에 두었다.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이 성립한 이후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자 (몽골의) 코카시아에 대한 통치는 더욱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귀족에 의존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 대체로 몽골에 협조했다. 몽골은 복속민의 군사 원정 참여를 강제하였기에 아르메니아, 조지아 귀족들은 주치 울루스와 훌레구 울루스 간 전쟁에 참여한다. 훌레구 울루스의 가잔 칸이 권력을 차지하고 이슬람을 국교화하면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자 귀족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아부사이드 재위기 훌레구 울루스와 주치 울루스 사이 대립은 절정이었다. 조지아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여기에 페스트까지 유행하자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고 티무르의 침입이 더해지면서 쇠락하였다. <br>몽골 제국의 탄생은 중세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캅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정복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고, 서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다. 몽골은 캅카스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수없이 파괴했지만, 생산과 교환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이전에 국제 무역에서 소외됐던 타브리즈와 마라가 같은 도시들을 성장시켰다. - P127<br><br>˝시베리아˝라는 지명은 13세기에 작성된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비르, 즉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세기까지 러시아에서 시비르는 오비와 이르티시 지역을 가리켰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출하면서부터는 우랄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P139). <br>몽골은 시베리아의 삼림 지대를 군사 자원의 원천으로 보아 복속을 시도했으며 원 조정은 캅카스 지역의 귀족들 상대로 한 것처럼 간접 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이 루스에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를릭을 하사하고 공물을 받은 것에서 입증되듯 몽골은 루스를 지배했다(P203). 몽골의 통치권은 인구조사와 공물 납부, 그리고 루스 공작들의 몽골 군사 원정 참여를 통해서도 관철됐다. 일반 루스인들은 몽골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고, 특히 숙련 장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작들은 주치 울루스를 자주 방문했고, 때로는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P180). 또 루스 공작들 중 몽골 지배층과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br><br>유럽, 아랍, 남아시아는 몽골이 직간접적으로 지배한 곳은 아니지만 이 시기 유라시아로 네트워크가 확장되어 연결된 만큼 서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외부 역사로 파트를 따로 다룬 이유다. 특히 무역과 상업, 종교, 과학과 기술 분야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br><br>유럽은 13세기 무서운 몽골 군대의 힘을 경험하면서 붕괴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충격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받으며 몽골이 어떤 나라인지 비로소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은 몽골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았으나 유럽인들은 몽골의 존재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몽골과 몇 차례 외교 소통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몽골의 내부 분열로 분권화하고 울루스들이 서로 다른 외교적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지만 상업 경제적으로는 달랐다. 흑해에 이탈리아 해양 세력,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무역을 확대하자 러시아와 일 칸과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br>유럽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존재는 아마도 선교사와 상인일 것이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까지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영향이 확산되었다. 초기에 몽골이 유럽을 침공했었으나 그 침략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자, 둘은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계가 발전했다. 정치적, 외교적 계획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해양 세력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호혜적 무역을 위한 유라시아 대륙로를 열었고, 흑해 식민지와 지중해 동쪽 항구라는 결절점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했다. 하지만 상인과 선교사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로부터 매우 분리된 상태로 지내며 몽골 지배층 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P238). 상인과 선교사가 유럽에서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니고 몽골 내에 자리 잡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br><br>몽골은 1219년 호레즘 왕국을 침공하면서 아랍 세계와 처음 맞닥뜨리게 되었다. 40년 뒤에는 이라크를 몽골 지배 하에 둔다. 또 1260, 130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침공한다. 시리아는 몽골로부터 두 차례의 침공을 받았으나 몽골이 잠시 점령한 뒤 얼마 후 맘룩이 지배권을 되찾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몽골이 아랍-중동에 진출한 이후, 사람들이 이라크, 자지라, 아나톨리아 등지로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로 이주하는 인구 변화가 발생했다. 맘룩-일 칸국(훌레구 울루스) 국경 지역에서는 일부, 어쩌면 상당한 정도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는 1320 년대 초 ‘평화 협상 과정‘과 함께 확실히 증가했다. 몽골이 아시아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한 것은 확실히 이집트의 술탄국, 그리고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가지 영향만 특별히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맘룩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몽골이 길을 닦았다는 점이다(P279). 몽골의 위협이 맘룩을 단결하게 했다니 아이러니다. 게다가 맘룩은 몽골에게 통치술을 배워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의 왕조를 만들었다. <br>남아시아(특히 인더스 남동부 지역)는 유라시아 대부분과 달리 몽골 제국에 통합되지 않았다. 몽골의 칸국과 남아시아 간에 외교 소통은 자주 이루어졌다. 이는 13~14세기 항해술이 발전하면서 더 활발해졌다. 무슬림, 힌두교도, 중국인 상인들이 운영한 상업 네트워크도 교류에 기여했다. 상업 교류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인도양의 해상 항로 뿐 아니라 미얀마와 티베트를 건너서 원으로 가는 육로, 델리와 이란을 연결하는 아프가니스탄 고개 길 등이 있었다. 은, 말, 향신료, 도자기, 직물, 노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는데 남아시아가 교역지이자 중개지의 역할을 했다. <br><br>몽골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통치할수는 없다˝는 중국의 유명한 클리셰를 반증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말을 탄 채 이동하며 통치하는 것은 단점이 없지 않았지만 매우 혁신적이었음이 입증됐다. 초기의 대규모 공격 이후에 몽골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활기, 유라시아 규모의 통합, 상업의 활성화, 기술, 과학, 예술의 혁신,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지정학적 지형, 초원과 정주 제국 모두가 받아들인 세련된 제도를 낳았다. 몽골은 그들의 파괴적 정복에서 기인하기도 했고, 근대 민족주의 정서의 부침에 의해 더욱 강화된 야만인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13~14세기에 이 제국적 유목민들은 세계를 변화시켰고,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 P363<br><br>이로써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읽기가 마무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술된 점이 아쉽기는 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욕심이었을까. 아무래도 남아 있는 사료들이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 많을 테니 또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생각한다. 모쪼록 관련 연구가 더 늘어나서 후속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봐야지. 이 시리즈 기획물은 몽골 제국의 역사적 흐름을 확인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까지 조망할 수 있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150/k50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83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 주제별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4651</link><pubDate>Fri, 08 May 2026 14: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46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905&TPaperId=172646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off/k42213790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905&TPaperId=172646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 주제별 역사</a><br/>미할 비란.김호동 엮음, 최소영 옮김 / 사계절 / 2026년 04월<br/></td></tr></table><br/>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권은 주제별 역사 중 이념과 제도, 종교와 과학, 사회/경제, 여성의 지위를 다룬다. 1권이 주로 몽골이 통일 제국을 형성했다가 분열한 이후의 역사를 정치에 집중해서 다루었다면 2권에서 이를 좀 더 주제별로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상위 챕터의 묵직한 주제만큼 여성의 지위를 동등하게 챕터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몽골 제국의 여성에 대해 다룰 비중이 크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br><br>몽골 제국은 통일 제국에서도, 4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진 제국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정치 구조 및 통치 제도를 유지했다. 몽골은 가족 및 가축과 함께 이동하는 텐트 복합체인 오르도를 운영했다. 어느 한 곳을 근거지로 정주하며 제국을 운영하는 경우가 익숙하지만 유목민은 보통 움직이며 생활하는 데다가 몽골은 통일되는 과정, 그 이후의 과정도 정복의 연속이었으므로 대상지 근처에 오르도를 옮겨 다니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우구데이 때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기존의 오르도 방식의 궁정은 계속되었다. 정복지에는 행정업무와 세입징수를 담당하는 ‘다루가치‘, 법적 문제를 판결하는 ‘자루가치‘를 배치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칸은 야를릭(칙령)과 우게(영지/명령)등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역참 제도(칭기스칸 이후 계속되어 뭉케 때 확장됨)를 운영하여 제국의 각 지역에 사신과 물품 운반을 이동하게 하였다.<br>통일제국 시기의 몽골군은 알긴치 (alginchi, 복수형은 alginchin)와 탐마, 정규군, 비유목민 군대, 카라울(qara‘ul) 혹은 카라굴(qaraghul), 케식 등 다섯 개의 주요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긴치와 탐마는 변경과 불안정한 지역에 주둔하는 부대였다. 정규군은, 예상되는 바대로 침략과 정복을 위한 군대였고 유목민으로 구성됐다. 비유목민 군대는 비슷한 형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카라울 혹은 카라굴은 ˝국경 수비대와 도로 순찰대 역할을 결합한 것으로 주력 부대의 일부로 기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케식, 즉 칸의 친위대는 군주의 개인 경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통일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전체적인 구조는 유사하게 유지됐다. 알긴치, 카라울, 케식 부대가 그대로 존재했으며 비유목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탐마는 몽골의 정복 활동이 줄어들면서 쇠퇴했을수 있지만 군대의 핵심 요소는 계속해서 기마궁사였다. 해군을 운영한 것은 대원 울루스가 유일한데 이는 고려의 우수한 선박과 항해술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br><br>어느 국가든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해서 통치 이념을 만들기를 추구한다. 몽골은 ‘영원한 하늘‘이라는 ‘텡그리‘의 힘을 받들어 믿게 하여 타 종교와는 다른 믿음의 영역으로 구분시켰다. 하늘은 제왕(칸)의 힘과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는 데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는 과거 한반도의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br>몽골인들의 이념적 메시지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신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원칙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범위한 지리적 범위를 가진 실제현상이었으므로, 세부 사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에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즉, 다른 전근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건설한 제국은 헌신적인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핵심 집단, 열정적이면서도 계산적인 합류자들로 이루어진 훨씬 더 큰 집단, 그리고 신들의 헤아릴 수없는 계획과 정복자들의 뛰어난 행운에 대개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수많은 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P102). <br>몽골은 타 종교에 대해서 대체로 상대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관용성을 보였기에 다양한 종교 간 상호작용이 활발했다(물론 무슬림으로 개종한 칸의 경우 종종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비단 종교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 및 기술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본다면 과학, 예술 분야가 아닐까. 이는 실용성을 중요시했던 몽골인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덕분에 의학, 천문학, 점성술 등 서아시아와 중국의 지식이 교류되어 다양한 결과가 축적될 수 있었다.<br><br>산업화 이전(더 구체적으로, 은행 제도 확산 이전)의 화폐 체계는 하위 수준(지역 내) 시장과 상위 수준(지역간) 시장의 교환 수단이 별도로 구성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체계는 근거리와 원거리 교역의 규모, 빈도, 계절성의 상당한 차이로 인해 별도로 작동했다. 몽골 정권은 하위 시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제국 전역의 공납 이동과 도량형 체계 통일을 결합원거리 교역에서의 화폐 통용성을 구축했고, 그 결과 전체 교역시스템에서 일련의 글로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 P155<br>은이 세계 공통 화폐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부터였다. 고대 시기에는 물물 교환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면 그 이후에는 화폐가 쓰였겠지만 그마저도 공통 기준은 없었다. 은이 쓰였다고 해서 모두 동전 형태의 은화가 쓰인 것은 아니고 은괴, 은화, 동전의 3층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무렵 세계 각지에서 은광이 발굴되고 유라시아가 교역로로 연결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다. <br>몽골인들과 그들의 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종교가 실천되는 방식과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더 넓은 틀 안에서 종교가 이해되는 방식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전자의 예는 이슬람 세계를 보면 충분한데, 그곳에서 아바스 칼리프조의 파괴와 그에 이은 몽골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수피즘의 부상뿐만 아니라 시아파 정치 권력이 부상하는 길을 열었다˝ 이 두 가지 발전은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 파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은 유럽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었으며, 이는 초기 근대 세계의 형성과 창조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 P240<br>금속공예, 도자기, 건축, 직물, 필사본 삽화 등에서 유라시아 전역의 기술과 양식이 혼합 및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원 지역의 문화에 티베트 불교/이슬람/기독교(천주교, 정교회 등) 양식이 더해졌을테니 상상해보면 다채로운 문화 양식이 공존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br><br>몽골 황실에서는 여성들이 때때로 주도적인 활약을 하였다. 칸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과 이해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칸이 공석일 때 황실의 여인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경제적으로 황실 여성들은 칸과 마찬가지로 쿠릴타이에 참석하고 정치적 조언을 했으며 독자적인 영지를 관리하면서 칙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또 사회적으로는 종교 활동을 후원하고 빈곤층을 구제하며 남편을 대신해 권위를 행사하거나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br>씨족, 부족 간 전략적 혼인을 통해 형성된 가족 관계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몽골 제국 통치하에서 칭기스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영예를 얻은 남성은 황제의 구레겐(giüregen, 부마)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마들은 통치자와의 긴밀한 사적 관계, 자신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더 큰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적 특권, 그리고 이후 다시 자신의 자녀를 황실 가문과 혼인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혜택을 누렸다. - P384<br>고려 시기 원 황실과의 정략적 혼인을 통해 고려 왕이 동시에 몽골의 부마가 되는 예를 떠올리면 된다. 부마 뿐 아니라 원의 마지막 황후였던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의 조정을 장악하기도 했다. <br><br>다만 몽골 시기 이후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않나 한다. 이전인 중국 당대(618~907)의 시각 및 문헌 자료들은 상류층 여성을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는 풍만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반면, 송대(960~1279)의 자료들은 날씬하고 심지어 연약해 보이는 신체를 강조한다. 중국에서 말타기는 여성과 완전히 무관하고, 심지어 남성들에게도 드문 일이 됐는데, 이는 금과 몽골의 침입으로 북방의 말 사육지가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상류층 가문에서는 아내와 딸의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게 규범이 됐다. 비상류층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농사, 가게 운영 등을 맡기도 했지만, 이후 수세기 동안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었다. 송대에는 전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족의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지역마다 다소 달랐지만, 문헌 증거와 고고학 증거 모두 12세기에 자리 잡기 시작해 상류층에서 모든 계층의 한인 여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음을 보여준다(하카, 위구르, 만주,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들은 수 세기 동안 전족을 하지 않았다)(P416~417). 송대 이후로 강화된 유교 규범 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의 점령은 중국의 혼인법에도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은 모든 민족 집단에 대해 몽골의 수계혼 관행을 합법화했고, 치열한 법적 다툼과 소송의 홍수 속에서 과부의 정절은 중국 여성들이 수계혼에 저항할 수 있는 법적 수단으로 부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계혼은 중국에서 불법이 됐고, 과부의 정절을 지지하는 법들은 중국의 왕조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P417). <br><br>앞선 1권이 전체적인 몽골 역사의 훓어보기 성격이라면 2권은 주제별로 정리해놓았기에 관련 분야를 찾고 싶을 때 참고하기 좋을 것 같다. 다만 저자마다 편차가 있어서 글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는 최대한 일반 독자를 위해 더 깊은 이해 수준을 위한 내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기술해서이지 않나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150/k42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753</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시와 물질 - [시와 물질]</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2197</link><pubDate>Thu, 07 May 2026 10: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621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722635525&TPaperId=172621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17/60/coveroff/e72263552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722635525&TPaperId=172621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와 물질</a><br/>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05월<br/></td></tr></table><br/>&lt;시와 물질&gt;이라니.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이었다. 시와 친하지 않고 시를 막상 읽으면 무슨 말인지 뜬구름 같이 느껴져서 아마 평생 읽은 시집이 손에 꼽을 것이다. 근데도 이 시집의 제목을 보니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혹할 땐 읽어줘야지. 초반에는 좀 진도가 안 나가다가 이후에는 의외로 쭉쭉 읽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시가 이리 두루뭉술하게 느껴지지 않다니.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라니. 내겐 좀 특별한 경험이었다.<br><br>왜 그런가 생각해봤는데 저자가 인용하는 책, 기사, 사건 등이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br><br>자본과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인간, 환경을 뒷전으로 하고 개발에 앞장서며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려는 자들에게 일침을 날린다거나 노동자를 가벼이 여기는 관행에 분노를 내뿜기도 한다. SPC 노동자 이야기는 시를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기도 했다(나는 그 이후로 파리바게뜨, 삼립, 쿠팡은 계속 불매 중이다). 예전에도 그래왔으니 계속 그래도 된다는 가벼운 생각은 선택하기 쉽지만 미래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다. SPC 공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에도 또 노동자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나. 대체 이런 관행은 언제나 바뀌는 건지.<br>광장은 위치가 변하고 목적도 변화하였지만 진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후퇴하는 광장터를 만들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보여준 단결과 의지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치는 지지부진하고 후퇴한다 해도 시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정치는 갈 길을 잃지 않을 거라 여긴다. <br>한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정부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미와 퐁니, 퐁넛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간이 오래됐다고 해서 덮어두기만 할 것인가. 여전히 피해자의 유족 및 후손들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이상 외면하지 말고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br>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구금된 뒤 구타로 3일 만에 사망한 아미니의 이야기도 있다. ‘머리카락 깃발‘이란 제목과 내용을 보며 눈물이 났다. ‘자유‘라는 두 글자에 무게감과 고통을 또 한 번 느꼈다.<br>몰랐던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주에 있는 ‘사과의 날‘이었다. 호주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자그마치 100년 간 시행했다고 한다. 정책은 1960년대 종료되었으나 실태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90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니...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흑백 분리, 인종 차별... 눈에 보이는 차별이 문제라고 인식한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문제임을 깨닫고 개선해나가는 중이라 여긴다.<br>조지 오웰의 장미라던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시도 반가웠다. <br>시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지만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장례식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버님이 가는 길이 떠올랐다. 옆지기는 그때 무척 힘들어했다. 만난 뒤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물을 보면서 죽음의 무게를 느끼기도 했다. 항상 아주버님에 대해 불만이 많던 그였는데 막상 그가 떠났을 때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옆지기였나보다.<br><br>시가 아니라 마치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에세이 같기도 하고. 내겐 너무 명쾌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br>독자에 따라 이 시들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호‘였다. 인간은 결코 단독으로 살 수 없고 세계는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417/60/cover150/e72263552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4176096</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 정치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9241</link><pubDate>Tue, 05 May 2026 21: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92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905&TPaperId=172592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off/k38213790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905&TPaperId=172592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 정치사</a><br/>미할 비란 외 엮음, 루스 던넬 외 지음, 조원희 옮김 / 사계절 / 2026년 04월<br/></td></tr></table><br/>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는 오래도록 몽골사에 몸담은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최근 학계의 내용과 의견을 담은 만큼 몽골 제국사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제1권은 주제별 내용 중 앞부분에 해당하는 정치사로 몽골 제국의 왕조사를 정리해놓았다. 구체적으로는 칭기스칸이 부족을 통일한 이후의 제국에서 4개의 칸국이 성립하고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nbsp;몽골사를 다시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펀딩에 참여하였고 기간 내 읽어주는 게 마땅하다 여겼다. 적절한 타이밍에 연휴 기간이 있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br>몽골 제국 이전에도 유라시아 역사에 요, 금 등의 유목 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이룬 성과는 지리적으로도 앞선 국가를 앞설 뿐 아니라 향후 제국의 역사에 기반이 되는 제도와 장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몽골의 시대는 과거의 종말이자 새로운 세계의 탄생으로 여겨졌으며, 최근에는 세계화를 향한 도약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P167).&nbsp;<br>몽골은 유목민의 사냥, 전쟁, 사회 조직 기술을 제국 시스템에 통합하였다. 칭기스, 우구데이, 구육은 초기 제국 내 규범을 구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칭기스칸은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한 뒤 1206년 몽골 제국을 선포하고, 십진법 기반의 군대 조직과 천호제, 황실 친위대(케식) 등을 도입하며 국가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서하(탕구트)를 복속시키고 금 원정, 중앙아시아 호레즘 정벌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칭기스칸은 죽기 전 네 아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주치에게는 호레즘에서 카스피해 북쪽과 서쪽의 킵착초원을 부여했고, 차가다이에게는 위구르와 트란스옥시아나를 주었다. 우구데이에게는 몽골의 고향 땅을, 톨루이에게는 우구데이 영토에 인접한 중앙 지역을 주었다. 우구데이 카안은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행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뭉케 칸은 제국 전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분할된 통치 체제를 재조정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br>카안(대칸)이라는 칭호는 칭기스가 죽은 이후, 아마도 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1264년경에 수여됐을 것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백색과 9라는 숫자를 길한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흰 깃발인 툭(tuq)은 초원 민족들에 대한 칸의 독점적 주권의 상징이 됐다. 1211년 이전부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대몽골국(大蒙古國, YekeMongol Ulus), 즉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의 중국식 명칭인 대금국(大金國)을 모델로 삼은 것이며, 한문 사료에는 대몽골국 또는 대조(大朝)로 기록됐다. 몽골의 집회에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상을 배분하면서, 이들은 제국 설립과 새로운 지배 엘리트의 추대를 위한 기반을 명문화하고 신성화했다. 몽골 사회의 무법과 폭력을 질서와 규율로 대체하려는 욕구는 곧 칸의 제도 개혁의 추진력이 됐다. 여기에는 초원 민족을 재편성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추종자들, 특히 영웅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과 눈에 띄는 충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도 포함됐다. - P52~53몽골이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고 그에 따라 많은 비유목 민족들과 땅들을 흡수하면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했다. 칭기스칸이 고향을 떠나 진군했을 때의 원래 목적(복수와 약탈)은 변화했다. 정복은 이제 신성한 사명이 됐다. 유라시아 초원은 점차 온전한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는 우구데이에 의해 완성됐다. 이로 인해 초원 주변의 정주 문명들은 칭기스의 후계자들이 계속 확장해나가는 제국에 저항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 일부로 편입될수밖에 없었다. - P95<br>앞선 통일 제국 시기(1206~1260년)를 지나고 이제 후계자들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nbsp;<br>먼저 대원 울루스(1260~1368년)로 이곳은 우리에게 원나라로 익숙하다. 뭉케에 이어 아릭부케와의 승계 전쟁에서 이기고 집권한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대도(베이징)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몽골의 공식 언어인 ‘팍바문자’를 도입(공식 문서 등 대외용 문자)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송 정복을 시작으로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까지 진출했다. 원은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한 뒤 대내외 활동으로 화폐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14세기 무렵이 되면 계속되는 해외 원정으로 국가 재정이 적자에 빠진다. 이후 제국은 기근, 역병이 들어 도적과 무장 집단이 증가하였고 지역 군벌들이 힘을 키우며 자연스레 제국 중앙의 힘은 빠지게 되었다.쿠빌라이는 집권 말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의 남중국 정복은 카안의 울루스에 몽골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제국의 원래 중심지인 몽골과 멀리 떨어진 해외 조공국들을 모두 아우르는 권위였다. 또한 이 정복은 몽골 통치자들에게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었고, 몽골 시대의 유명한 문화 교류를 활성화한 제도들의 정점이 됐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톨루이 계열통치자들은 이 전례 없는 해상 연결을 통해 중동과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어냈고, 이는 청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이르는 후대 유라시아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다. - P294<br>뭉케는 훌레구에게 지금의 이란 지역의 총독을 맡겼다. 훌레구의 임명은 훌레구 울루스(1260~1335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훌레구 울루스는 일 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 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이는 ‘칸’이 아니라 ‘일’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일’은 종속의 표시로 훌레구의 지위가 형 뭉케와 쿠빌라이에 비해서 낮음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만 훌레구 울루스는 화폐에 ‘일 칸’이라는 용어를 왕조 초기부터 꾸준히 사용하였다. 아무튼 훌레구가 세운 이 왕조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 서남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가잔 칸은 과세 방식 개선, 도량형 표준화 등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아부사이드 치하에서 왕조는 이슬람 문화를 기반으로 번영했으나 후손이 끊기며 막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훌레구 울루스는 다른 울루스에 비해 그 역사적 기간이 짧다. 우선 훌레구 울루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란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국경이 불안정했다. 차가다이 세력은 주기적으로 습격하였고 주치 가문 역시 울루스 북부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또 이집트의 맘룩 왕국은 주치 가문과 상호 의존 동맹을 맺으며 위협에 힘을 보탰으니 훌레구 울루스는 오래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nbsp;그럼에도 훌레구 울루스는 이슬람 신학과 철학을 넘어서, 동방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표현이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P389)는 의의를 가진다.&nbsp;<br>금장 호르드에 소속된 민족들은 주치의 이름을 따라서 주치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치는 처음에 서몽골과 시베리아 삼림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호레즘의 오아시스와 서부 초원을 받은 데 이어 정복 활동으로 러시아의 여러 공국, 크림반도, 볼가-우랄 지역, 북캅카스까지 몽골 지배 하에 두게 되었다. 금장 호르드(주치 울루스: 1260~1502년)는 이슬람교를 수용하여 중앙아시아, 동유럽, 러시아에 이를 확산시켰다. 바투의 동생 베르케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이후 금장 호르드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술탄이라 부르며 주화에 새겼다(물론 칸이라는 용어도 썼다). 또한 지배층은 무슬림의 다양한 행정 인력을 등용하여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슬라브 지역에 있던 공후들은 칸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과 면세 혜택을 받으면서 점차 부상했다. 이는 특히 모스크바 공국의 출현을 이끌어냈다. 우즈벡 칸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이후 흑사병의 유행과 내부 갈등, 티무르의 견제 등으로 쇠퇴했다. 이후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훗날 모스크바 공국이 금장 호르드의 영향력을 대체하게 되었다.&nbsp;<br>마지막으로 후계국 중 하나인 차가다이 울루스다. 안타깝게도 기록이 가장 적고 연구도 미비하다고 한다. 나도 차가다이 울루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여러 국가 사이에 끼어 있었던데다 잦은 전쟁과 인재 유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미비했던 이곳이 몽골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티무르 제국과 인도 무굴 제국의 발원지가 되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델리 술탄국이나 맘룩 왕국 같은 나라들, 교황청과도 관계를 맺었다. 뭉케 사후 차가다이 울루스는 톨루이 가문과 계속해서 갈등했다. 그렇지만 차가다이 가문은 권력을 계속 이어가 17세기 후반까지 모굴리스탄을 통치했고 그의 후손들은 20세기 초까지 신장에서 권력을 유지했다.몽골 중앙아시아는 ‘몽골의 시대’라고 불리는 번성했던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참여했으며, 중심지라는 위치에 비해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닐지언정 그 일원이었다. 강력한 칭기스 칸 계통의 정체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중국과 이란에 견줄 만한 정주 기반이 부족했던, 경쟁하는 두 울루스의 본거지인 중앙 몽골 울루스는 몽골 정체들 중에서 패배자로 간주되었다. 이는 중국, 이란, 러시아와 달리, 우구데이와 차가다이의 영역을 물려받은 현대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몽골 중앙아시아는 단순히 지속했다는 사실 이상으로 몽골과 세계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겼다. - P640&nbsp;<br>한반도의 고려 역사와도 관련 있는 대원 울루스는 익숙하지만 이 책으로 더 세밀히 알게 된 부분도 있어 소득이 있었다. 훌레구 울루스와 금장 호르드는 지리적으로 멀고 문화적으로 멀어서 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것 같아서 좋다. 차가다이(중앙 몽골) 울루스는 상대적으로 몽골사에서 비중이 낮게 부여되었던 부분이었는데 그 영항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nbsp;다만 정치사라고 하기에는 실제를 다 담지 못하는 것 같다. 정치 뿐 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 등의 분야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근까지의 역사 동향을 알려준 것이 좋았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 그리고 저자의 의견, 반론 등을 실어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눈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폭력성에 주목했던 경우도 있었다면 팍스 몽골리카에 주목하며 경제적, 문화, 종교적 영향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한쪽에만 쏠려 있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150/k38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612</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6691</link><pubDate>Mon, 04 May 2026 11: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669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7905&TPaperId=172566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off/k50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150/k50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83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5710</link><pubDate>Sun, 03 May 2026 20: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571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02137905&TPaperId=172557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off/k50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8/cover150/k50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83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4129</link><pubDate>Sat, 02 May 2026 20: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412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905&TPaperId=172541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off/k42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150/k42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753</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2812</link><pubDate>Fri, 01 May 2026 2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5281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905&TPaperId=172528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off/k42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7/cover150/k42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753</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읽고 사고 살고(2026.04.29)</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5618</link><pubDate>Wed, 29 Apr 2026 1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561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137906&TPaperId=172456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7/11/coveroff/k212137906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7808&TPaperId=172456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52/coveroff/k11213780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4월에는 굵직한 책들로 구입했다. 지난 달까지 책을 구입해놓고 아직 안 읽은 것들 투성이라 이번 달은 건너뛰려고 했는데 생각났을 때 사놓지 않으면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결국 사기 위한 변명이지만.<br><br>아무튼 멋진 리뷰를 써주신 이웃님 덕분에 &lt;남성 판타지&gt;를 구입했고 &lt;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gt;는 펀딩했다.<br>몽골 제국사는 그동안 읽어둔 것들도 있고 해서 건너뛰려고 했는데 1권 내용보다는 2, 3권 내용이 궁금하여 결국 펀딩을 결정했다.<br>사실 정치사는 재미가 떨어지지만 일상사, 미시사나 주변사는 훨씬 재미가 있으니까. 3권의 내용이 그런 것을 다룬다. 2권은 주제별로 역사를 다룬 것이다. 이런 책은 레퍼런스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이미 1권은 읽기 시작했고 어느덧 4부를 읽고 있다. <br>남성판타지는 진짜 너무 무거워서 들다가 떨어뜨릴 뻔하여 식겁했다는. 조심 조심 다루어야할 것 같다. 사실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너무 두꺼워서 책 내부가 찢어질까봐 걱정이 되는데 모쪼록 잘 떨어지지 않는 제본이면 좋겠다. 내용은... 와. 이걸 읽을 수 있으려나. 그렇지만 늘 그렇듯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덜 후회하는 법이니까 (언젠가) 도전!!!<br>그리고 오랜만에 커피 500g으로 샀다. 커피를 점차 줄이고 있는데 간혹 3시 넘어서 커피를 마시면 좀 부담되는 경우가 있다. 늦게 마시지 않으면 좋지만... 이른 아침에도 위에 부담이 덜 갈 것 같고 해서 디카페인으로 샀다. 오늘 아침 드립해서 마셨는데 역시 맛있었다.<br><br>어제도 늘 그렇듯이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비가 온 뒤라 흐리고 쌀쌀했다. 옷깃을 여미며 한 바퀴 돌고 회사에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탁 하고 내 몸을 쳤다. 옆지기였다.<br>옆지기는 나와 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다. 사실 나는 그를 회사에서 처음 만났고 1년간 몰래 사내 연애를 하다가 그후 옆지기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 뒤로 우리는 4년의 연애 기간을 더 갖고 결혼했다. <br>어쩌다보니 지금 가까운 거리에 일터가 있어서 출근길에는 옆지기가 차로 데려다주고 퇴근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이렇게 산책길에 만날 때가 있다. 근데 3년 정도 이렇게 일하는데 산책길에서 만난 것은 손에 꼽는다. 옆지기는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오히려 자전거는 가끔 탄다). <br>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어서 좋은 점은 이야기가 통한다는 점이다. 전문 용어를 이야기해도 이해를 못하면 아무래도 대화를 이어가는 데 한계가 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때는 내가 일이나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회사가 망해서 이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어느 때는 옆지기가 일이나 회사 문제로 골머리를 쌓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 버팀목이 되었다. 이 직업 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옆지기는 만남을 갖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게 가장 좋은 친구다. <br><br>4월이 단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다. 금요일도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날이 노동절이었다(그 사실을 알고 출근길이 갑자기 매우 즐거웠다). 5월 4일 부랴부랴 휴가를 냈으니 이제 며칠 간의 휴가가 다시 생긴 셈이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겠지만 날이 좋으니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지. 산책하면서 볕도 쪼이고 어느 정도는 옆지기와 재밌는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남은 4월을 정리하며 5월을 또 반갑게 맞이해야겠다.<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52/cover150/k11213780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5231</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5332</link><pubDate>Wed, 29 Apr 2026 08: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533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24533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24533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혁명의 러시아 1891~1991</a><br/>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br/></td></tr></table><br/>2차 세계대전은 혁명을 심화하고 확장했다. ... 볼셰비키는 총칼을 사용해 러시아 혁명을 동유럽으로 수출했다. 이런 측면에서 냉전은 1917년 볼셰비키가 시작한 국제 내전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 ... 레닌의 권력 장악은, 러시아처럼 후진적인 농업 국가에서는 혁명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으며 산업화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줄 국가나 더 선진화된 산업 국가에서 혁명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발상에 근거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제외하더라도 스탈린,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는 모두 이런 신념을 공유했던 레닌주의자들이었다. ... 이러한 이유로 나는 혁명이 1991년 소련 체제의 붕괴와 함께 끝나는 100년의 단일한 사이클로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 P9~10<br>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의 대학살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일어났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차르 정부 권위에 대한 대중의 도전으로 갈수록 급진적인 반대 세력으로 비화되었다. 노동자 뿐 아니라 이는 농촌에도 확산되었다. 국민들은 국회를 만들고 입헌군주제를 설립하기를 요구했다. 차르 정부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nbsp; 다양한 반정부 운동이 정치적으로 결집하지 못했고 군대는 정부에 여전히 충성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빠르게 중단한 정부는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nbsp;<br>1906년 러시아는 의회 시대에 들어섰으나 황실은 여전히 정치 권력의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는 차르와 귀족이 지배하는 상원의 동의 없이 의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르는 두마의 요구가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 해산을 명령했다. 여러 정당들은 민중을 모아 이를 규탄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힘은 모이지 않았다. 총리 스톨리핀은 각 농민 가정에 공동경작지를 사유재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려 했다. 황실과 이권을 뺏기기 싫은 귀족 이하 전제군주정 옹호자들은 결집했고 스톨리핀의 개혁 시도를 무효화했다. 이후 그가 암살당하며 개혁의 동력은 꺾이고 말았다.<br>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차르는 선전 포고 후 두마의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부에 전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와 더불어 개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차르는 못이기고 두마를 재소집한다. 1916년 무렵 황후와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에 의해 두마는 다시 폐회되어 정치 개혁의 기회를 잃어버렸다(같은 해 12월에 라스푸틴은 살해되었다). 게다가 황후가 군사 기밀을 독일 측에 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는 바람에 군대 내 사기와 규율은 떨어지고 이는 차르와 군주정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br>1917년 2월 혁명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진 것이다. "차르를 폐위하라! 전쟁을 그만하라!" 총파업과 시위는 이어졌다. 차르는 당연히 무력을 동원하여 군중을 탄압했다. 2월 26일(피의 일요일)에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는데 군인들이 차르와 군중 중 군중 편에 서면서 폭동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두마 지도자들은 긴급히 임시정부를 구성했고 소비에트는 임정을 지지하겠다 발표한다. 이 체제는 10월까지 지속되며 이중 권력 체제를 지탱하게 된다. 황제는 황위를 포기하고 미하일 대공에게 권좌를 내주었으나 군중이 반발하며 그도 권좌에서 하야하며 러시아 마지막 군주정인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그러나 소비에트와 임시정부 모두 농민과 노동자들의 요구 사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레닌은 임정에 대한 지지를 그만두고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 선언한다(4월 테제).&nbsp;<br>레닌은 소비에트를 비롯한 다른 정당은 모두 반대하며 볼셰비키에게만 권력이 집중되기를 원했으나 대다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는 소비에트들이 이미 볼셰비키의 수중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드디어 군사혁명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의 부대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를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케렌스키가 카자크 부대를 규합하여 볼셰비키에 대항했지만 이때 부르주아 세력, 사회주의 우파, 중도파 등은 세력을 잃었다.&nbsp;<br>1918년 1차 대전의 강화 조약을 맺으며 전쟁이 이제 끝나는가 했으나 백군과 적군 간에 내전이 곧이어 발발하였다. 전쟁으로 집단징집제가 시작되면서 물자는 부족해지고 탈영은 줄을 이었다. 개인 상업활동은 폐지되고 대부분의 산업이 국유화되었으며 배급제를 통한 사회 통제가 강화되었다. 적군의 물자(사람 포함) 징발로 인해 기아까지 가는 상황이 되자 국민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게 된다. 농민들은 자치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파업은 계속되었다.&nbsp;<br>레닌은 1921년부터 두통과 피로에 시달리며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레닌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정부는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삼두정치체제를 통해 운영되었다. 레닌은 몸이 회복되었다가 다시 뇌졸증이 찾아왔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에도 여전히 집단지도부 하에 있었기 때문에 최고권력자는 아니었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낸다.&nbsp; &nbsp;1932년 러시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소비에트의 5개년 계획은 배급량을 삭감하고 노동 규율을 강요하는 등 국민 생활의 질을 떨어뜨렸고 이에 불만에 찬 국민은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파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집권자인 스탈린은 당을 정화한다는 명목 하에 반대자(로 생각되는 이)는 숙청한 반면 엘리트 노동자는 승진을 시키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만들었다. 스탈린 집권부는 그동안 진행한 공산주의로서의 방향을 전환하여 좋은 삶에 대한 이상을 그리며 소비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다. 스포츠, 오락 등을 강화한 반면 가부장 가족의 서사는 돌아온 것이다.&nbsp;<br>스탈린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또 숙청을 감행한다. 이전에도 반대파로 몰며 숙청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 시기와 규모에서 앞선 시기를 압도했다. 구볼셰비키를 축출하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리더들을 몰아냈다. 숙청 대상자에는 일반 평범한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유혈, 대량 살인이 벌어졌다. 소수 민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대규모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이후에 고향에 돌아간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안타까웠던 것은 숙청자를 찾는 과정에 밀고자나 제보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물질 보상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 등 자발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협박 등에 의한 비자발적인 동기도 있었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면 모를까 지인에게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 같다. 어디 비단 이 사건 뿐이랴.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 이런 상황이야말로 아비규환이 아닐런지...<br>러시아는 장기적으로 코민테른 주도 하에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를 세계에 수출하는 한편 외무인민위원회를 통해서 서방과는 관계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연합 전선을 펴기 위해 히틀러에게 명분을 던져 주었다. 이후 양국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니 결과적으로 크나큰 실수였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러시아 국민들은 조국애를 주입받으며 희생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았다.&nbsp;<br>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미소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러시아는 국가 이념 모시기 경쟁에 돌입, 많은 국가를 소비에트 하에 두려했다. 대부분은 이에 동화되었고 반기를 든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유일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한동안 베리아, 말렌코프, 보로실코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 체제가 이어졌다. 그러다 1956년 흐루쇼프가 당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스탈린의 테러를 폭로하는 연설을 감행하는데 이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많은 국가들(특히 동유럽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반면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계기도 되었다).&nbsp;이어서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보수적 입장을 유지하며 최대한 현 체제를 흔들지 않으려 했다. 이는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동유럽,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의 사회주의 국가에 내정 간섭을 감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nbsp;<br>고르바초프는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마지막 볼셰비키'다. 고르바초프는 레닌의 혁명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었으니 이상주의자였다라 할 수 있다(레닌이 살던 시기 전후에 둘이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에 지금이야말로 레닌의 혁명을 통해 소련이 부활할 수 있다 믿은 것이겠다. 레닌은 공산주의는 바로 올 수 없고 그 전에 자본주의를 거쳐가야 한다고 보았다. 고르바초프는 경제적으로 이전에 계획경제에 의한 규제를 폐지하고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는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그리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민주주의, 다원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는 헝가리 혁명, 체코 시민운동,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불러오는 등 동독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을 불렀다. 레닌의 이상을 따르다 역설적으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 원인 제공자가 되다니 참 뭐라 해야 할지.고르바초프가 이렇게 물러나자 이후 집권한 옐친은 폭발한 민족주의 운동에 대응하여 소련공산당을 금지하고 각 공화국 내 소비에트 경선을 도입하는 조치를 취했다. 현 집권자인 푸틴은 재선, 삼선을 거듭하며 소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하고 러시아는 강대국임을 강조하는 중이다.&nbsp;<br>1891년부터 1991년까지 러시아 근현대사를 압축하여 정리한 책이다. 얇아서 부담이 확실히 덜하다. 분량상으로 보면 읽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읽는데 오래 걸린 것은 처음에는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며 비교해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여러 일들이 겹쳐 완독하기까지 오래 걸릴 것 같은 거다. 이러다간 앞선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마저 읽어버렸다.<br>책의 두께감에 압박을 느끼는 분들에게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한 번에 접할 수 있는 무난한 책이라 여겨진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4675</link><pubDate>Tue, 28 Apr 2026 22: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467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905&TPaperId=172446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off/k38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150/k38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612</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닥터 지바고를 읽고 단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3489</link><pubDate>Tue, 28 Apr 2026 13: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348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2434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14&TPaperId=172434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4/coveroff/897291511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06&TPaperId=172434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3/coveroff/897291510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239X&TPaperId=172434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68/46/coveroff/893292239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2381&TPaperId=172434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68/43/coveroff/893292238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최근 러시아의 근현대사를 집중해서 읽다가 우연히 알고리즘에 의해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들어봤지만 저자의 이름은 좀 낯설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라...' 되뇌어봐도 입에 탁 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을 다 읽을 무렵 저자의 이름이 덜 낯설어지게 되었으니 다행인건가. 

러시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러시아 인명에 익숙해지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건가 다시 한 번 느낀다. 
성과 이름을 합쳐서 하나만 쓰면 될 것이지 이들은 이름이 워낙 길다 보니(성이 겹치니 구별을 위해 길어지는 것 같기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 있다. 문제는 원래의 이름과 발음조차 비슷하지도 않은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매번 다른 인물인가 하고 헷갈리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아, 아까 그 사람이구나...' 하는 경우가 몇 번이고 생긴다는 말.

닥터 지바고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그 이후의 갈등과 여진, 적군과 내군 간의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그려지는 사랑 이야기다. 보편적인 주제인 사랑 이야기라 오히려 기대치를 내려놓고 봐서인지 나름 잘 읽었다. 물론 나는 역사적 배경에 더 꽂혀 읽었으나 점차 주인공의 감정과 서사에 연민을 느끼면서 마지막에는 주인공 남녀의 결말에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짠하기도 해서 복잡한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세월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말이 있던가. 사람은 의지를 갖고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지만 이것은 너무 팍팍하지 않을 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내 땅을 빼앗기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선택의 자유를 빼앗긴다면 돌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이웃과 국가, 세상은 협력자가 되었다가도 배신자가 되기도 한다. 

지금에 와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세계적인 사건이지 당시 러시아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제군주정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이들이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겁니다! ... 전 러시아의 지붕이 뜯겨져 나갔고, 전 러시아의 민중과 우리는 열린 하늘 아래 놓이게 된 겁니다. 우리를 감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자유! 말이나 요구뿐이 아닌 진짜 자유, 기대 이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유죠."
"모든 이에게 변화와 대변혁이 일어났죠. 각자에게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인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의 혁명이라고요. 제 생각에 사회주의,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혁명이 강줄기가 되어 흘러 들어가는 바다, 삶의 바다, 자주성의 바다예요. ... 이제 사람들은 책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몸으로,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 혁명을 겪기로 결정을 내린 거죠."

이들이 원하는 이상은 공동의 목표인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각자 다름을 인지하게 된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편, 다른 한편에는 볼셰비키 편에 선 이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보다 건설적인 계획을 위해서 일정 정도의 파괴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측이 있었는가 하면(파괴의 정도는 논외로 하고)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여 새 삶을 일구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군중의 목소리를 빌어 '역사의 현장'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노동자 주민은 거주 공간을 제공받아 이주하고, 노동자가 아닌 주민은 새로운 집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과연 이들은 이런 형태를 원했던 걸까? 사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혁명이 그들을 깨우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더 큰 억압의 굴레를 마주해야만 했다. 생각했다. 과연 이들 중 진정으로 혁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그중 다른 이들에 의해 동화된 사람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변혁을 꿈꿀 수는 있어도 결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경우는 도중에 파기될 수도 있고 실현 가능성조차 낮을 수 있다. 사실 영웅은 몇 명에 불과하다. 서로를 모방하며 만들어진 우연이 역사가 되기도 한다는 것, 필연 같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이들은 이후 이동, 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깝거나 먼(또는 모르는) 이들을 통해 배신을 경험했으며 파멸, 죽음의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쟁터에 나갔고 여자들은 간호사로 나가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정을 살리기 위해 더 힘든 고난을 마주해야 했다. 
 
라라는 일찍부터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고 미쳤으며 이후의 인생은 파멸, '돌아서 사는 삶'을 살아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서 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천사 같은 광영을 본다. 라라가 하는 모든 일이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인 것을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아니겠는가. 
유리 지바고(유라)는 의사로 혁명 초기에는 이념을 열렬히 신봉한 만큼 열정적이었으나 10월 혁명 이후에는 시들해진다. 피를 흘려가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일었고 삶과 유리된 구호가 의미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붙이고 있는 현실의 삶이었다. 나도 지바고의 이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치만 파트너로 토냐 대신 라라를 선택한 것은 선뜻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토냐는 가정을 누구보다 잘 꾸려나간 강인한 여성이었다. 결국 감정이 가지 않았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데... 그래도 이미 있는 가정을 놓고 이상의 여인을 쫓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유라와 라라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자꾸만 커져 가는 라라에 대한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유라는 (드디어는) 결심 끝에 라라의 집에 간다. 이때 하필 지바고는 부대의 의사가 살해당했다며 의료 노역자로 동원당하고 만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강제 동원에서 빠져 나와 라라와 다시 해후한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탈영을 한 것이었기 때문에 쫓기는 입장에서 그녀와 헤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끝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한다. 둘의 최후가 어쩜 그리 안타깝던지... 그리운 이를 두고 떠나가는 마음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면 참 먹먹하다.  

"내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 구부린 팔꿈치가 당신을 기억하는 한, 내 팔과 입술이 당신을 느끼는 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리라. 뭐든 훌륭하고 오래 기억될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리라. 부드럽고 또 부드러운, 아프게 슬픈 묘사로 당신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리라. 이것을 다 할때까지 이곳에 남으리라. 그 후에 떠나리라. 이렇게 당신을 표현하리라. ..."

3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4월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겨우 읽었다니 너무 오래 걸렸다. 길이가 상당한 소설인 만큼 등장 인물도 많고 그들 간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 사실 이해하는 것에 집중을 요하지만 중반 이후에는 부담감을 내려놓고 막 읽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배경 이야기를 적는 데는 수월해서 금방 적어내려간 반면 인물을 이야기하고 그들 간에 이야기를 어떻게 적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어서 자꾸 글이 멈칫 멈칫 했다. 

그래도 써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아 짧게나마 기록해둔다. <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68/43/cover150/893292238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168433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2263</link><pubDate>Mon, 27 Apr 2026 21: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226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905&TPaperId=172422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off/k38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150/k38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612</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0087</link><pubDate>Sun, 26 Apr 2026 2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4008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7905&TPaperId=172400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off/k382137905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96/cover150/k38213790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9612</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베이징 여행기(2026.04)</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28147</link><pubDate>Mon, 20 Apr 2026 15: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28147</guid><description><![CDATA[지난 주 베이징에 4박 5일 간 여행을 다녀왔다.<br><br>대부분 인생에 한 번쯤은 자금성과 만리장성에 가보는 꿈을 꿀 것이다.<br>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br>그러고 보면 어릴적부터 내 버킷 리스트에는 유독 어딘가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많았다.<br>무언가를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은 그때부터 내게 소중한 가치였던 셈이다.<br><br>베이징에 대한 인상은 상하이와는 완전 달랐다.<br>상하이는 금융 도시이자 경제 특구로 일찍부터 개방되어 외국인들, 관광객들이 많아 음식도 그렇고 글로벌적인 느낌이 강하다면<br>베이징은 중심가를 제외하면 골목에 옛 정취가 남아 있어 로컬적인 느낌이 강했다.<br>그리고 지역 범위가 넓어 가려는 곳을 걸어다니기는 무리인 만큼 지하철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나 있는 편이었다(총 17호선이었던가?).<br>상하이는 도보를 많이 했고 항저우는 디디를 많이 이용했다면 베이징은 지하철을 정말 많이 이용했다.<br><br>베이징은 상하이보다 확실히 정치적인 느낌이 있다. <br>어딜 가든 보안 검색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경찰서가 거의 도로 한 블럭마다 존재했고 돌아다니는 군인과 경찰이 많았다. CCTV는 말할 것도 없고^^<br>또 봄철 황사가 워낙 악명이 높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심했다.<br>폭우가 내린 한 날 빼고 대기질이 불쾌하다고 날씨앱에서 계속 알림이 왔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은 예사인지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분들이 많았다. <br><br>만리장성은 여러 개의 코스가 있다. 현재 3군데 정도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일찍부터 개방된 팔달령 만리장성이다. 이곳은 시내에서 기차로 이동할 수 있어 접근성이 좋아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리고 목전욕 만리장성이 있다. 이곳은 후에 개방된 만큼 보존 상태가 좋아 외국인 등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지만 버스 투어로만 이동 가능한 단점이 있다. 세번째는 사마대장성이다. 이곳은 야간에 개방이 되어 주로 야경을 보러 가는 곳이다. 앞선 두 곳이 낮에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이곳은 밤에 가볼 수 있는 만큼 특화된 점이 있다. 나는 사람에 떠밀리는 게 싫어서 목전욕 만리장성 코스를 택했다.&nbsp;<br>만리장성 가기 전날에 폭우가 내렸다.<br>봄철 베이징에는 비가 거의 안 내린다는데 폭우 수준으로 내리다니 아무튼... <br>당일 오전 7~8시 무렵까지 비가 내려서 걱정했는데 11시가 넘으니 구름이 걷히면서 해가 나기 시작했다.<br>하지만 오후가 날이 좋았어도 아침 일찍부터 이동하지 않았다면 인파에 떠밀려 사진 찍기도 어려울 뻔 했다.게다가 운무에 쌓인 만리장성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br>케이블카와 리프트-루지 코스가 있었는데 나는 체력을 생각해서 케이블카를 골랐다(사방이 뚫린 곳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br>14번에서 18번 코스까지 다녀왔다. 19, 20번은 깔딱 고개라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br><br>천안문과 자금성은 보통 같은 날 관광하는 경우가 많다.<br>천안문은 처음에는 개인으로 갈까 했는데 사전 예약이 갈수록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자금성은 공부 안하고 가면 건물만 보다 올 것 같아 해설을 들으려고 투어를 신청했다.<br>단체라도 사전 예약이 어려워서 못 가는 경우도 많다는데 다행히 되어서 다녀올 수 있었다.<br>오전부터 황사가 심했고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br>천안문를 입장하는 데까지는 직진 코스를 다 막아버려 빙 둘러가야만 했다. <br>검문소 앞을 도착했을 때는 10시도 안 된 시간이었는데 이미 사람이 꽤나 되었다. 개인 줄은 이미 몇 바퀴를 돈 상태였고 단체 줄은 좀 적었다. 보통 개인 줄이 단체 줄보다 훨씬 길다고 한다. 심한 날에는 3~4시간도 서는 경우가 있다고. 그늘 하나 없는 볕에서 30분 넘게 서 있으니 이미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에 끝나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운이 좋은 것이었다. <br>천안문 광장하면 떠오르는 모택동. 나는 이것이 사진인 줄 알았는데 그림이란다. 게다가 매년 그림을 바꾼다고. 예전에는 전담 화가가 있었는데 현재는 미술 대학 교수와 재학생들이 합작해서 그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br>자금성은 역시나 노란? 황금? 기와가 인상적이었다. 물론 우리나라 궁궐처럼 자연스런 느낌은 아니고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다. 한줄로 쭉 선 궁궐들은 고압적인 느낌이 강했다. <br>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br>전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긴 하지만 국내 방문객의 경우 지방 곳곳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특별한 추억을 갖고자 하기에 대부분 명, 청 시대의 전통 복장과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br>우리도 고궁 방문 때 한복을 입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처럼 이곳도 그런 것인가보다. 아무튼 복장이 정말 다양하고 화려했다.<br>베이징 하면 경극이 유명한데 사실 볼까 말까 망설였다.
내용을 하나도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그치만 현지에 가서 경극을 볼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과감하게 질렀다. 
대부분 관광 상품은 여러 극의 레파토리를 짜집기하여 1시간 남짓으로 구성하고 차를 곁들여 공연하는 것이 많았는데 나는 그런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모로 찾아본 끝에 완전한 극본의 풀 공연을 하는 곳을 찾아 사전에 예약하여 찾아갔다. 경극 배우로 유명했던 매란방을 기려 만들어진 공간인 매란방 대극원이었고 제목은 &lt;옥잠기&gt;다. &nbsp;사랑 이야기라 잘 알아 듣지 못해도 극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방 좌우로 대본이 나와 도움이 되었다.&nbsp; <br><br>이렇게 여행 기간 동안 보고 걷고 먹고 쉬고 그러면서 지냈다.<br>책은 한 자도 안 읽었다(혹시나 해서 종이책을 가져갔지만 역시나 그대로 가지고 왔다는^^;).<br>이번에도 서점은 한 곳을 다녀왔고 페이지 서점이라고 내부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br>특히 어린이 책 코너가 참 잘 되어 있다고 느꼈다. 나도 그 코너에서 2시간쯤 머물면서 책을 읽다가 졸다가 하며 보냈다. <br>그리고 나오기 전 ‘역경(주역)‘ 관련한 만화책이 있길래 한 권 구입해서 왔다.<br>위화 등단 40주년 기념으로 된 책 ‘인생‘이 있었는데 살까 말까 하다가 무거워서 제외했다. 이미 읽기도 한 내용이니까.<br><br>온몸이 욱씬욱씬 여독이 풀리려면 며칠 걸릴 듯 하다. 그래도 언젠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곳을 다녀와서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420/pimg_715516173510023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28147</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사라지는 노동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 - [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09996</link><pubDate>Sat, 11 Apr 2026 11: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0999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20999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off/897297200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20999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a><br/>이라영 지음 / 동녘 / 2026년 02월<br/></td></tr></table><br/>작가의 이름은 여러 번 접했지만 책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간인 이 책이 노동사이자 한국 광업의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은 있었으나 읽은 분들의 후기가 궁금했다. 좋은 책이라는 반응이 많아서 믿고 읽어도 좋겠다 싶어서 구입은 해놓았으나 다른 책들에 밀려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이 책을 이달 함께 읽는 책읽기 모임에서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읽을 순간은 이렇게 더 빨리 찾아왔다.<br>작가의 아버지는 양양의 광업소에서 30년을 넘게 일을 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양양에 살면서 광부들의 삶과 생활을 보고 들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부모는 가능한 그녀가 광산의 일에 거리를 두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일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곁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으니 그녀는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광산이 들여다 보아야 할 과제로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국내 광산은 공급 감소와 가격 경쟁력에 밀려 상당수가 사장길을 걸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1994년 일하던 광업소가 폐광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다 죽었어.”라는 그녀의 아버지의 말이 미뤄둔 숙제를 결행해야할 때임을 주지시켰다.&nbsp;<br>광부하면 동굴에서 채광을 하는 모습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광업은 여러 일로 나뉘어져 있다. 크게는 직접 작업장에서 일하는 생산직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무직으로 나뉜다. 이 생산직은 다시 갱 안에서 일하는 부서와 갱 밖에서 일하는 부서로 나뉜다. 갱 안에서 직접 광물을 캐는 채광직이 우리가 흔히 보아온 광부의 모습이고 이 채광을 위해 각종 기술을 지원하는 부서, 채광한 광물을 운송하는 부서 등 여러 부서가 있고 갱 밖에서도 전기나 중장비를 다루는 각종 기술직과 운반직, 채광한 광물을 선별하는 업무인 선광과가 있다. 쇳돌을 고르는 ‘선광’은 거의 여자들 몫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 한국 수출품 중 2위가 흑연, 철광석이었다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할 만하다.&nbsp;<br>양양 광업소는 국내 최대 자철을 생산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33년 시험 채광을 시작하여 1938년 광산사업소를 짓고 광산 채굴을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양양 동굴에서 캐낸 철광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6년 국유화된 후 채굴을 재시작했고 1973년 포항 제철이 생기기 전까지 양양 광업소는 국내에 필요한 수요를 담당하다가 이후에는 생산된 철을 일본으로 수출했다 한다.&nbsp;해방 후 양양은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지자 양양은 북한 땅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후 휴전이 되자 남한 땅이 된 것이다. 양양하와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정작 뜻을 찾아볼 생각은 못하고 막연하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차별과 혐오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nbsp;&nbsp;‘양양하와이‘라는 속어를 연구한 이한길은 "양양하와이란 단어의 의미를 역사적 맥락, 군사적 충돌, 당시의 사회적 긴장 속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5년여의 인공생활, 다시 5년여의 전쟁과 점령지로서의 생활, 도합 10여 년의 생활은 이 시대의 양양 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에 충분했다며 양양하와이의 유래를 더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양양 사람들은 남쪽 사람들과 대화를 할적에는 항상 말 한마디마다 조심을 하였다. 그러니 말이 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대하던 남한 사람들은 양양 사람들을 가리켜 하와이라고 하였다. 마치 외국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고 비유했던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양양과 강릉은 가까운 지역임에도 미묘하게 말씨가 다르다. 지금도 나는 강원도말을 ‘북한 말씨 같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웃기 어렵다. - P180조심해서 느릿하게 말을 하는 것 뿐인데 이를 하와이라고 표현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되짚어보면 강원도 사람들의 말이 북한 사람들의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매체 등에서 너무나 안일하게 코미디 소재 등으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를 생각 없이 퍼나르고 배우지 않았나 곱씹게 되었다.&nbsp;양양의 이런 이력은 작가의 가족력과도 이어지는 면이 있다. 작가의 할아버지는 1921년생으로 남로당 당원으로서 좌익 활동을 했다. 한국 전쟁 중 할아버지가 실종이 되자 월북을 의심받으면서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들었다. 연좌제는 남은 가족들을 정서적으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남한 사회 내에서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주었다. 원래 작가의 아버지는 군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연좌제라는 발목은 그가 온전한 직업을 가질 수 없게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네 아버지가 주저앉았잖아. 광산에.”라며 그때 그의 스트레스는 말도 못했다며 삶이 온통 울분에 차 있었다고 표현한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말에 함축된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 못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1978년 여러 노력 끝에 할아버지의 사망신고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아버지는 광부라는 직업을 비로소 얻을 수 있었다. 그 전에는 늘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며 감시 받는 세월을 견뎠을 것이다. 연좌제로 피해를 겪은 그는 광산의 불합리한 환경을 바꾸어보고자 광산 노조를 결심했으나 빨갱이에게는 그마저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여러 번 시도하여 결국 노조위원장까지 갔다고). 게다가 당시 노조는 어용노조로 정부의 구미에 맞는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1980년 4월 일어난 사북항쟁은 신군부가 노조를 정화하겠다며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과 충돌의 현장이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령 후 노동법이 개정되어 노조는 산업별 체제에서 기업별 체제로 전환되었고 노조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1987년 직선제가 시작되면서 노조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분출했다. 그렇지만 이무렵이 되면 광산은 이미 규모가 축소화되면서 노조의 힘도 발휘되기 힘든 환경이 되었다.철광산업이 사장길에 접어든 것은 수입산 철광석이 증가하면서 국내 철광 가격이 경쟁력에 밀린 탓이 크다. 석탄산업이 사장길에 접어든 것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아파트가 증가하고 석탄 대신 기름 보일러를 때기 시작하면서 연탄 소비량이 감소되었고 1989년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있다. 1995년 정선의 탄광촌은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며 투쟁한 끝에 합의를 보기도 했다. 이를 비롯해 여러 광산에서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nbsp;<br>광산 투쟁은 다른 산업 노조 투쟁과는 달리 여성들의 참여율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광업소와 사택의 거리가 가까워서 자연스레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은 사택촌에서 노동가를 익히기도 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노조에 힘을 던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아버지가 노조 위원장으로 집에 몇 달간 자리를 비우는 동안 강릉에서 작가와 함께 있으며 투쟁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런 영향 때문에 작가도 양양 철광산이 폐광 투쟁할 때 여성들의 활약을 몰랐다고 한다. 가정(과 아이)을 생각했던 측면도 있을테고 아버지의 활동이 그녀에게 부담을 준 측면도 있었으리라 보인다.<br>적지 않은 여성들이 ‘어머니마저‘ 밖에서 투쟁에 참여했을 때 자식들의 위치가 더욱 취약해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그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만 정상적인 어머니로 인정받는다. 다른 자원이 없는 여성에게 모범적인 어머니 되기는 중요한 가치다. 1980년 사북항쟁에서도 자식 때문에 참여하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집단생활이나 다름없는 지역에서 투쟁에 참여하지않는 아내/어머니의 복잡한 입장이 있다. - P272<br>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직업도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다. 어떤 직종은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기에 사라지는 수순으로 가는 게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 직업은 사라져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꾸준히 이동한다.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사회가 그들의 이동경로에 무심할 뿐 사람들 대부분은 사는 동안 꾸준히 일을 바꿔가며 생존한다.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은 이름 없이 소멸하고, 이 삶의 경력은 무수한 노동으로 채워진다. - P45~46<br>일자리를 잃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나도 최근 몇 년간 지속해오는 걱정과 불안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AI가 등장하면서 인력이 기계로 대체되는 흐름을 더는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광업 종사자들은 그 일에만 익숙하던 사람들이라 실직에 많은 이들이 무너지곤 했으리라 짐작한다. 과연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삶을 이어갔을지 궁금했는데 그 이야기도 담겨 있다.<br>광부들은 공통적으로 경제적 상실을 겪었고 일하던 환경과의 단절 속에서 관계가 분리되었으며 그리움(향수)를 경험했다. 그렇지만 광산 이후의 삶은 천편일률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떤 이들은 다른 광산을 찾아 떠났고 아예 다른 직종을 찾기도 했다. 아파트가 늘어나던 1990년대 중반에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거나 시험을 봐서 주택관리사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카지노 기계실에서 일하다 이제는 사회복지가이자 서예 강사, 아마추어 연극인이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죽어도 여기에서 죽겠다며 그곳을 떠나지 않고 채굴노동자에서 현장 관리 소장이 된 사람도 있다. 광산을 떠나 직업을 찾은 이들은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거나 구직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 들고 여러 취미를 가지며 정서를 돌보는 경우가 많았다.&nbsp;<br>그렇다면 폐광 후 그 도시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정동진은 1991년까지 석탄 광산이 있었다가 폐광된 후에는 해돋이 관광지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경우다. 광명도 탄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테마 산업인 황금 동굴로 알려지게 된 곳이다. 동해는 노천 광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대한 테마파크로 변모했다. 문경도 대표적인 탄광 도시였으나 지금은 사극 촬영지로 더 유명해진 곳이 되었다. 정선 사북은 폐광 후 지역 경제를 진흥시키겠다는 목적으로 들어선 강원랜드로 이미지가 많이 변화한 곳이다. ‘극단 광부댁’은 광산 이야기를 전하는 연극 단체로 구성원들 중 광부 부인들이 있어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다. 처음에는 정선 아리랑을 배우는 동아리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도박 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시민 연극 단체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nbsp;<br>광업은 이제 한물 간 산업이고 광부도 빛바랜 존재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음을 느낄 때 정작 광업 종사자(였)던 사람들과 가족들은 힘을 잃는다(고 한다). 정작 국내 광산은 여전히 300개 정도가 운영 중이고 석회광산은 특히 많이 남아 있다고(정말 몰랐던 사실이다).&nbsp;<br>작가는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러나 기억은 온전히 믿기가 어렵고 회고는 증언이 될 수 있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자신이 온전히 기억할 수 있는 시기는 해석과 판단이 개입할까봐 거리두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우려스러웠다고.&nbsp;<br>작가는 우려스러웠다지만 나는 이 책이 한 가족의 노동사이자 양양의 광업사로 확장되고 그곳에 살던 사람의 광부로서의 삶과 이후의 세계까지 담아낸 점이 정말 좋았다. 일반 역사책처럼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히는데다가 사람들의 이야기에 녹아들다보면 감동과 함께 생각할 점을 많이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남성 광부의 삶 뿐 아니라 선광부로 일하는 여성의 삶, 그리고 광부 아내로서 사는 여성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광부는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매일 출근하는 이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가족을 챙기던 여성들의 삶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탓이다. 그들의 지원은 국내 광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믿는다.&nbsp;<br>싸우는 사람들이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일상의 평범한 얼굴 속에 이미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흐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특별하게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싸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것. 또한 이 싸움은 완벽하지 않고 모순과 뒤엉킨 채 일상을 살아가는 얼굴들이라는 것. 평범한, 싸우는 사람들이 지탱해온 역사의 일부를 기록하고자 했다. 혀가 없다고 취급받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목소리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 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 사람의 역사"는 여전히 부족하다. - P618]]></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150/897297200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90449</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쇳돌</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07707</link><pubDate>Fri, 10 Apr 2026 07: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20770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2077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off/8972972002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150/897297200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90449</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쇳돌</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8273</link><pubDate>Sun, 05 Apr 2026 18: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82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002&TPaperId=171982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off/8972972002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9/4/cover150/897297200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90449</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5819</link><pubDate>Sat, 04 Apr 2026 09:4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581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1958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일상, 봄봄(2026.04.03)</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3847</link><pubDate>Fri, 03 Apr 2026 09: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3847</guid><description><![CDATA[매해 봄꽃이 피는데 언제나 봐도 좋다. 올해는 작년보다 빠르게 개화를 시작하여 벚꽃도 거의 반 이상이 폈다. <br>도심에 있으면 아무래도 삭막한데 이 시즌이 오면 만개한 봄꽃들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매일이 설레는 것 같다.<br>어제는 특히 날이 좋았다. 이틀 연속 날이 흐려서 피어난 꽃을 찍어도 우중충해서 아쉬웠는데 어제는 날이 쨍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는 살짝 나쁨이었지만 봄 치고는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수준이었다.<br>점심 먹고 산책 나갔다 역시나 많은 인파에 놀란…!<br>사람들이 꽃을 배경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봄은 봄이네.‘ 싶었다. <br>물가는 고달프고 전쟁 소식 때문에 암울하지만 그래도 봄꽃이 핀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잠시 행복 회로를 돌리게 하는 듯하다.<br>원래라면 벚꽃이 이번 주말이 피크일텐데 오늘 밤부터 비가 온다고 한다.<br>남은 봄 예쁜 풍경 많이 마주해야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6/0403/pimg_7155161735080040.jpg</url><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3847</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3712</link><pubDate>Fri, 03 Apr 2026 08: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371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1937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1785</link><pubDate>Thu, 02 Apr 2026 08: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178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1917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1035</link><pubDate>Wed, 01 Apr 2026 20: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9103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1910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밑줄긋기</category><title>[오늘의 한문장] 혁명의 러시아 1891~1991</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8259</link><pubDate>Tue, 31 Mar 2026 22: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825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531540&TPaperId=171882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off/k61253154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2220/48/cover150/k6125315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2220487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1894년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중심으로 밑줄 정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4566</link><pubDate>Mon, 30 Mar 2026 20: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456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82636948&TPaperId=171845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30/14/coveroff/e48263694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630412&TPaperId=171845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405/24/coveroff/k39263041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894년 동학농민운동 제1차 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대신 흥선대원군을 받들고 새 정부를 세우려 했다. 동학군의 1차 진주성 전투 성공을 계기로 조선 조정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한다. 동학군은 군사적으로 일본군의 맞수가 되지 않았지만 나약한 조선 조정은 그런 농민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21) 1885년 맺은 텐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유폐, 대원군을 옹립한 뒤 조선에 개화 정권이 들어선다. 일본은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주한 외교관을 보호하고 공사관 피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한 고종 보호 예방 조치에 대한 지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을 가설하면서 경비를 이유로 현지에서 인부를 구하고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사유지에 함부로 전신주를 시우는 등 추태를 부렸다.&nbsp;<br>그동안 남접과 북접 동학군은 따로 움직였는데 이제는 각 지도자 측에서도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nbsp;<br>전봉준은 동학 북접 교단과 연합작전을 모색하면서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접촉한 사실이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동학교도 장두채라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을 만났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군과 합세해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뜻을 맞춘 뒤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앞으로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nbsp;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사자를 보낸 사실도 포착되었다. 1894년 8월에 전봉준이 태인에 있을 때 두 사람이 찾아와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내밀었다. 서찰에는 "서울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야 하니 곧바로 서울로 진격해달라"고 쓰여 있었다.&nbsp;또 8월에는 흥선대원군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농민군에게 겉으로는 효유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했으나 뒤이어 재봉기를 당부하는 글을 은밀하게 보냈다. 흥선대원군의 수족들도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며 양쪽의 뜻을 전했다. 9월 초 무렵 전봉준은 송희옥의 편지를 받았고 이어 흥선대원군의 밀사인 박동진과 정인덕이 전주로 내려와 전봉준에게 재봉기를 당부했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76~77)<br>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친서를 보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전봉준 계열의 동학 인사가 흥선대원군과 정말 접촉을 했을까. 일본 첩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는 부분이 걸린다. 다만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연락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여진다.&nbsp;<br>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역사넷 '동학농민운동' 中)<br>위 사료를 보면 책의 전개 내용과 상당히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정말 대원군은 효유문을 내려서 표면상으로는 동학군의 봉기의 흐름을 억제하려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봉기를 계속 가져다주길 바랐을까. 사실 개인적으로는 대원군이 설사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고 해도 온전한 마음이었을지는 회의적이다. 아무리 무너져 가는 조선 왕조였다고 해도 왕조 국가의 최고 수장자의 눈에 동학군의 봉기가 곱게 비칠리 없기 때문이다(2차 봉기 때 공주에서 일어난 전투 상황을 보면 조선 조정은 관군과 일본군과 함께 지방 사족과 유생에 힘을 빌어 농민군을 탄압하는데 혈안을 올렸다).&nbsp;&nbsp;<br>남접집단이 9월 10일 삼례 재기포를 단행하고 북접교단이 9월 18일 기포령을 발하였으나, 두 집단 모두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묘연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원군 효유문과 더불어 고종의 선참후문 교서 등이 삼남일대에 전해지자 갑오변란 이후 척화거의를 도모했던 척사유생들조차 항일연대는 커녕 도리어 반동학군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 몇몇 호남 지역의 북접계 지도자들이 남북접 연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남접계 동학군의 집요한 ‘동참 요구’ 때문이었다. ... 9월 18일 기포령 이후 북접교단 휘하의 동학군도 관아를 습격하여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무장대를 편성하기 시작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9월 그믐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 中)<br>호남에 속한 김낙철 등은 남북 교단의 조화방법을 모색해 김방서, 유한필, 오지영 등을 먼저 전봉준에게 보내 화해를 건의했다. 고대하던 전봉준을 이를 받아들여 전라도 지역 북접 인사에 대한 압박을 중지하고 세 사람을 최시형에게 보내 타협을 모색했다.신중을 기하던 최시형은 이들을 만난 뒤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등 교단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했다. 여러 북접 지도자는 논의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집강소 기간에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남접 북접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통속으로 보아 탄압했고 교단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포교들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최시형은 손천민을 전봉준에게 보내 진의를 확인했고 손천민은 이를 최시형에게 알려 연합전선을 펴야 한다고 건의했다. 손병희는 대세를 거론하며 남북접이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시형은 마침내 전국의 교도들에게 남북접이 손을 잡고 항일전선에 나서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대동원령이라 한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85)<br>북접 선봉장 이종훈은 10월 중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장내리에 도착하여 사흘 동안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해월신사께서 군사 지휘부를 정할 때 의암 선생에게 대통령기호를 받게 했다. 전규석을 선봉으로 삼고, 나는 중군으로, 이용구를 후군으로 삼았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준칙으로 받들어 논산으로 내려가 전봉준과 군대를 합했다. 두 군이 진용을 합한 지 사흘 만에 의암 선생께서 해월신사를 모시고 오셔서 진중에 주둔하고 머물러 계셨다.(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 P97~98)<br>남북접 연합의 세력은 차이가 있지만 그 과정은 비슷하게 기술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nbsp;<br>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의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lt;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gt;도 역시 삼례 봉기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에 반해 &lt;198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gt;에서는 삼례 봉기와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기에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전투에서 동학군이 패배했다. 첫째로, 일본군과 관군이 우금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고 공주로 들어오는 통로를 봉쇄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시켰다. 농민군은 같은 포위 작전을 폈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비해 그 변경 범위가 넓어 압박하는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무기의 열세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방의 사족이나 유생들 대부분은 관군과 일본군에 협력했다(물론 일부는 동학군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동학군이 내건 기치가 그들에게 먹히지 않았기에 혁명을 위한 탄력을 받기에 부족했다. 그리고 남북접 내부 세력의 충돌과 갈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북접과 남접 간에만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같은 북접끼리, 같은 남접 끼리도 세력 다툼이 있었다. &lt;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gt;는 패전의 원인 중 가장 먼저 2차 봉기 준비 과정에서 삼례에서 시일을 너무 끌었던 이유를 대었다. 북접 지도자와의 호응과 동의를 얻는데 시간을 빼앗겨 정작 일본군과 관군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면서 우위에 서게 했다는 이유다.&nbsp;&nbsp;<br>공주 전투 후 전봉준은 포기하지 않고 물러나 다시 몇 차례 공격했으나 원평, 태인 전투에서 패한 것을 끝으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nbsp;<br>이렇게 &lt;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2&gt;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청일전쟁을 치르는 일을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 운동이 실패하고 전봉준이 재판을 받는 결과까지가 그려진다. 이 책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전국적인 관점에서 일어난 봉기 내용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느꼈다. 전라, 충청 지역 뿐 아니라 경기, 황해 등 다른 지역의 상황도 다룬다.&lt;1894년 남북접 공주 점거투쟁&lt;은 제목과 노선의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급진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2차 봉기 중 북접 진영의 더 상세한 상황과 공주 중심의 전투 과정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각했다.<br>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405/24/cover150/k39263041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4052452</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3502</link><pubDate>Mon, 30 Mar 2026 11: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835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137901&TPaperId=171835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10/coveroff/k4021379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02137901&TPaperId=171835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a><br/>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br><br>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lt;역사 속 여자 OO하다&gt;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br>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br>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br><br>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lt;여자, 식모 살다&gt;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lt;여자, 회사 가다&gt;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br><br>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br>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br><br>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br>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br><br>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br>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br><br>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br>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br><br>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6/10/cover150/k4021379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61058</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74923</link><pubDate>Thu, 26 Mar 2026 14: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749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82636948&TPaperId=171749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30/14/coveroff/e4826369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82636948&TPaperId=171749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a><br/>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09월<br/></td></tr></table><br/>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br><br>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br><br>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br><br>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br><br>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br><br>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br>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br>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br>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br>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br>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br>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br><br>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br>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br>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br><br>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30/14/cover150/e4826369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74301483</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마이리뷰] 러시아의 역사 - 하 - [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58039</link><pubDate>Wed, 18 Mar 2026 17: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580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14&TPaperId=171580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4/coveroff/897291511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14&TPaperId=171580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a><br/>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br/></td></tr></table><br/>소련 역사 전체는 비록 생존과 성취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커다란 어려움, 위기, 갈등의 이야기도 하다. ... 그러나 소련 역사를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이 역사를 그토록 놀랍고도 눈에 띄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어떤 다른 근대국가 이상으로, 공산주의자들(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 즉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았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는 진화되고 변화되었으나-모든 상황과 결정을 그것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렌즈로 남아 있었다. - P707~708<br><br>앞선 상권에 이어 하권은 19세기 중후반부터 푸틴이 집권한 시기까지를 다룬다. 푸틴 집권 시기는 2008년 정도까지만 다루는데 이는 현재 제8개정판이 나온 시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아쉬움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본으로 나온 책 중에 러시아의 통사를 훓을 수 있는 책은 그나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해보였다. <br><br>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정부인 젬스트보를 설치하여 대중 교육과 의료에서 상당 부분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법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게 하고 배심원 재판과 치안판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법 제도를 개선하였다. 또 하층 계급만 하던 군 복무를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확대하는 대신 복무 기간을 축소하고 군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군법과 법 절차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재정을 혁신하고 교육 및 검열을 조금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여러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br>대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상을 맺고 발칸 반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또 캅카스 전역,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극동 경계를 넓혔다. 그러나 농민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br>농노 해방은 러시아의 근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진행된 정부의 정책으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공 등을 비롯한 귀족의 이익은 커져가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일부는 봉기, 탈주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실상 이 문제는 한 세기 이상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주기적으로 농민들의 봉기를 불렀다. 이 무렵 인텔리겐치아들도 농노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상황이었다. 정부로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에 농노 해방은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인 1861년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에게 제공된 토지는 여전히 불충분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과 소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br>문제는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동안 진행했던 개혁이 다 부정당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변화를 최소화하면서 종교 통일(정교회), 전제 정치, 국민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니콜라이 2세 시기에도 이어진다. <br><br>20세기 초, 노동자들의 불안과 자유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확산으로 1905년 혁명이 발생했다. 두마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자체 입법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 개혁을 통해 농민은 자유 이동이 가능해졌다. 귀족의 수는 감소하였고 귀족이 가진 보유지의 수도 감소했는데 이는 부의 상당수가 국가에 진 빚을 청산해서 남은 돈이 얼마 없었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귀족들은 많은 경우 이민을 떠났고 그러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대신 기업가, 사업가, 기술자 같은 중간 계급이 떠올랐다. 정부는 철도를 증설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였으며 중공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칸 전쟁과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도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br>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문학가들이 탄생했다. 투르게네프가 1840년대를 배경으로 관념론자들, 자유주의자, 허무주의자, 인민주의자들을 다루었다면 1860년 무렵 등장한 도스토옙스키는 반합리주의, 슬라브주의에 입장에 서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종교적으로 세속에 대한 비판과 예언을 다루었다. 이밖에도 잉여인간을 다룬 곤차로프, 교회 및 민중을 다룬 레스코프, 인텔리겐치아/농민/염세주의자를 다룬 우스펜스키, 현실을 풍자한 실티코프, 상인 중하층 계급을 묘사한 오스트롭스키, 평민 영웅을 다룬 고리키, 근대 단편 소설을 창시한 체호프 등이 나왔다(관련 문학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br><br>1917년 2월 23일 식량을 달라며 일어난 섬유 노동자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2월 26일 임시 두마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면서 로마노프 왕조를 종식시켰다. 이 무렵 소비에트도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온건한 자유주의 입장을 고수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레닌이다. 레닌은 현 정부가 부르주아적이라면서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주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산업을 노동자평의회의 통제하에 두는 등 사회 혁명의 방안을 제안하고 즉각 종전을 요구했다. 볼셰비키가 10월 25일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br><br>1921년까지 볼셰비키는 무력을 동원한 급진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사기업이 사라지고 국유화되었으며 사적인 교역은 억압되었다. 강제 배급이 실시되고 모든 토지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내부 반발로 백군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주변국도 적군에 의한 통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1928년까지 국가 회복을 위한 후퇴이자 타협으로 자유도를 조금 높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도시에서 활동하는 소기업인들이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부농의 수가 증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기존 공산주의자들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br>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 시기 러시아는 국가적 산업 계획 정책으로 농업 집단화를 완성하면서 농업 생산량을 다소 증가시켰고 식량 배급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급 노동이 일상화되고 임금 격차는 확대되었으며 강제 노동이 시작되었고(반대 세력에 대한 대숙청)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요식 행위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낳았다. <br><br>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일었다. 스탈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난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제1서기로 올라서면서 권력의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시기 러시아는 개인숭배에 기반한 스탈린주의를 벗어나 레닌체제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 소비를 자극하면서 산업 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중심에 서 있었고 중국과의 갈등, 쿠바와의 전쟁이 있었다. <br>이후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모스크바 중앙에서 정치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정치가 정체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복지 정책이 확대되고 데탕트 정책으로 훈풍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br>고르바초프는 낮은 성장률로 침체된 경제로 인한 불만과 이전 같은 이데올로기적 강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레닌주의 사회주의 이상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은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자율권을 부여하고 통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설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소련은 동유럽을 포기하고 동유럽의 국가도 독립을 자처하면서 결국 1991년 소련은 붕괴의 길을 걸었다. <br><br>옐친은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대통령 선거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최고위 권력자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재임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사유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재임기 중반기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면서 내분이 극대화되었다. 이후 그는 개혁을 후퇴하면서 사회 안정성을 높이려 했으나 급격하게 진행된 사유화는 사회적 혼란을 높이고 부패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체첸전쟁이 벌어지자 옐친은 푸틴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옐친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는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br>권력자에 올라선 푸틴은 러시아의 발전과 진보를 강조하며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화하였고  강력한 중앙 통제를 바탕으로 관리형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관리형 민주주의는 비정부기구를 통제하면서 다른 견해가 들어설 공간을 위축시키는 것인데 용어만 좋게 포장한 것일 뿐 과연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푸틴은 헌법을 고쳐가며 현재도 집권중이니 말이다. 더불어 크림 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을 노리며 시작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br><br>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최근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되어버린 ˝원한의 정치˝에 사실상 편입되었다. 공산주의의 종식이 많은 고통, 소외, 공인된 모욕 등을 초래했다는 것은 냉혹한 사실이다. 특히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문화와 여론에서 주류이며, 공식적인 미사여구가 되었다. - P1002~1003]]></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4/cover150/897291511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731443</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러시아의 역사 - 재정 러시아 시대까지 - [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53667</link><pubDate>Mon, 16 Mar 2026 13: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5366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06&TPaperId=171536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3/coveroff/89729151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5106&TPaperId=1715366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a><br/>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br/></td></tr></table><br/>역사의 재료는 바로 지속성이다. 비록 모든 역사적 사건이 독특하고, 따라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유동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지도록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재와 과거의 관련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성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주장일 따름이고,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비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보이는 이 책의 표제도 하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많은 특정 민족들, 문화, 역사를 "러시아"라는 제목 아래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중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러시아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차이점을 인식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얻어내고, 자신들의 역사가 러시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 P30~31<br>오늘날의 러시아가 오기까지 역사는 어떠했을까.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과정이 궁금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도무지 끝날줄 모르는 상황을 보며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이는 까닭에 분석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또 러시아 관련 문학 작품을 더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앞선 인용문을 통해서도 느끼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복잡다단한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느꼈다. 

러시아의 기원은 키예프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키예프국은 동슬라브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과의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상했다. 전성기(980~1054년)의 키예프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의 많은 지배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같은 시기 유럽의 국가들처럼 기독교를 수용했다(로마가 아닌 비잔티움으로부터). 키예프는 지배 하에 있던 영토에서 모피, 밀랍, 꿀, 노예 등을 공물로 거두고 비잔티움 등과 교역하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사회는 최상위층이었던 공, 보야르(귀족), 드루지나(가신), 스메르디(농민), 자쿠피(반자유농민), 수공업자, 노동자, 노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은 군사 지휘권 뿐 아니라 재판권, 행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보야르, 드루지나가 이에 협력하였으나 전쟁 등을 논의하거나 긴급 법령 등을 결정해야 할 때는 민회가 소집되었다.&nbsp;이런 키예프가 몰락하게 된 것은 내부적으로는 교역로가 파괴되고(국제 교역에서 키예프의 가치가 떨어짐) 정치 체제가 실패(합의 없는 무력에 의한 지배, 친족 간의 공동 통치, 형제 간 순환 통치 간의 갈등)하면서 국가 붕괴를 이끈 탓이 크다. 거기에 남동쪽 스텝 지대에서 끊임없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소모전을 치룬 이유도 더해졌다.&nbsp;<br>공의 독립 보유지에 따른 분령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키예프는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1240~1380년까지의 몽골이 핵심 타격이었고 남서부는 리투아니에게, 북부는 노르웨이, 독일, 스웨덴에게 의해서였다. 키예프인들은 언어적, 민족적으로 갈라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인 세 분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몽골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대를 차지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빼앗기고 권력의 중심이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nbsp;<br>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br>15세기 초 킵차크 한국은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으로 분리되고 모스크바는 1480년 몽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nbsp;모스크바 러시아 시기 이반 3세(1462~1505년)는 흩어져 있던 주변 공국들을 모으며 통합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 공주인 소피아와 결혼하면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높였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와 결혼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중앙 집권적 정치를 진행하던 모스크바가 지방 분권형 정치를 진행하던 리투아니아에 대해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nbsp;&nbsp;<br>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br>모스크바 러시아는 이반 뇌제와 표도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반 4세(이반 뇌제)는 개혁을 하는 한편 공포정치를 병행하며 근대 국가 및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했고 볼가 지역과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표도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루지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 지위가 낮아지며 봉직 귀족과 충돌 및 갈등이 빚어지자 정부는 봉직 귀족의 편을 들면서 농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들고 일어났다. 또 표도르가 죽을 당시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여기저기에서 권력자임을 참칭하며 사회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면서 일단락되었다.&nbsp;<br>미하일 정부는(1613-1645년) 국제 관계를 안정화시키고 재정 확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뒤이은 알렉세이는(1645-1676년) 1649년 탈주한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기한이 무기한으로 변경된다는 법을&nbsp; 공포하면서 농노제를 더욱 강화했고 우크라이나까지 모스크바의 관할 영역을 확대했다.&nbsp;행정을 뒷받침한 것은 보야르 두마 혹은 협의회(오늘날로 보자면 의회)였고 차르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다. 관료의 수가 증가하며 관료제는 확대된 반면 지방행정은 취약해졌다. 이 시기 농업은 여전히 중심 산업으로 위치했으나 교역, 수공업, 제조업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nbsp;알렉세이 시기 종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기독교 저술이 활발해졌고 교회 개혁 운동 진행으로 국가와 교회가 통합되었다. 유럽을 통해서 서구의 세속 문학이 확산되자 개인주의 주제가 대두되었으며 궁정 극장이 설립되면서 러시아 희곡이 시작된다. 이전부터 유행하던 성상화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원근법, 해부학 지식이 더해져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초상화 같은 세속적 회화도 등장하였다.<br>18세기부터 19세기는 제정 러시아의 시기다. 이 시기는 제국 시대라고도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이자 이전 러시아 시대라고 불린다.&nbsp;<br>18세기의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농촌 사회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국가농민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대략 수는 비슷했다. 농노의 처지는 표트르 대제로부터 파벨과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1800년 무렵에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다. 세금 부담의 증가 이외에도 농민들은 점점 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농노들이 시정 요망 사항에 대한 청원권조차 가지지 못하고 주인의 의지에 사실상 완전히 예속됨에 따라서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 P407<br>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개혁을 단행하여 군대, 행정, 교육 시스템을 근대화했으며, 대북방 전쟁 승리로 발트해 주도권을 확보하고 폴란드에도 우위를 확보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영토 확장(폴란드 분할)과 학문과 예술 발전을 이끌며 근대화를 주도했으나 이 시기 농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시기 러시아는 프랑스,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국가와 스웨덴, 영국, 러시아 연합 간 전쟁 끝에 빈 회의에서의 협약으로 유럽 내 위상이 높아졌으나 내부적으로는 농노제 폐지 실패와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갈등이 일었다. 니콜라이 1세는 관제 국민성을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페르시아,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화했으나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힌다.&nbsp;<br>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력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분할은 지속적인 결과를 낳은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민족 문제"의 출발이 폴란드 분할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394<br>19세기 전반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과학 등 학문이 발전하면서 인텔리겐치아가 대두되는 등 지적인 해방이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관념론이 유행하는 한편 슬라브주의, 민족주의 같은 보수주의 기치가 일어서기도 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3/cover150/89729151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731371</link></image></item><item><author>거리의화가</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일상(2026.03.12)</title><link>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45788</link><pubDate>Thu, 12 Mar 2026 12: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4578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630413&TPaperId=17145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405/47/coveroff/k982630413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70006&TPaperId=17145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520/76/coveroff/893567000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342637526&TPaperId=17145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0/75/coveroff/e34263752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E482636948&TPaperId=17145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7430/14/coveroff/e48263694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239X&TPaperId=171457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9168/46/coveroff/893292239x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s://blog.aladin.co.kr/roadpainter/17145788'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오래 전 앞부분만 보았다가 묵혀놓았던 중국 드라마 삼국지를 최근에 보기 시작했다.<br>2010년작이니 꽤 오래된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공들여 만든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대배우들이 된 주연 배우들을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고. <br>아무튼 워낙 스케일이 크고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지라 당시 연기자 가동 범위 풀을 다 끌어다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는 김에 만화로 쉽게 설명해주는 중국어 삼국지도 읽고 있는 중이다. 드라마만큼 진도를 뺄 수는 없지만 매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br><br>그리고 알라딘에서 산 노트로 중국어 단어 공부를 진행 중이다. 듣기만 하고 단어 공부를 안하니 제자리 걸음이거나 퇴보하는 것 같아서. 건너뛰는 날도 있지만 아직까지 2일 이상은 넘기지 않고 있다. 욕심내지 않고 하루에 2~4개 단어를 쓰면서 공부한다. 많은 양의 단어가 아니라서 투자 시간은 길어봤자 20분 남짓이지만 노트의 빈 페이지가 채워져감을 보는 일은 작은 성취감을 준다. <br><br>주말이면 여지없이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한다. 겨울 동안에는 해가 짧아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날이 밝았는데 이제는 7시만 되어도 해가 난다. 오전 시간이 인적이 드문 편이라 걷기 좋지만 그동안은 추워서 좀 미뤄왔다. 이제 걸어도 될 듯하여 얼마 전 이른 새벽 산책을 하며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역시 더 좋았다. 당분간은 이른 아침 산책을 하지 않을까 싶다.<br><br>이것 저것 읽는 중이다. <br>우선 러시아 역사 책을 읽고 있다. &lt;러시아의 역사&gt; 상권을 끝냈고 하권을 읽는데 하권이 아무래도 내가 관심이 있어서 알고 싶었던 내용들이 많다. 상권의 뒷부분과 하권의 앞부분은 재정 러시아 말과 혁명 초입 기간까지로 혼돈의 사회상만큼 이야기 소재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문학과 예술 분야가 풍요로웠다. 종이책을 주로 사지만 전자책도 조금씩 산다. 급하게 읽어야 하거나 종이책으로는 딱히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을 전자책으로 사는 편이다. 혹은 대여 기간이 충분한 경우 살 때도 있다. 열린책들 문학 전집도 마지막 이유 때문에 구입했었다. 리스트를 보니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들어 있어서 굳이 새로 구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러시아의 역사를 읽으면서 닥터 지바고를 읽기 시작했다. 다 읽으면 남길 이야기가 많으면 좋겠다^^<br>지난 달 동계 방학으로 쉬어갔던 역사책 함께 읽기도 이달 예정되어 있어서 동학 운동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lt;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gt;은 기존 동학 운동의 역사가 전봉준이라는 구심점, 호남 중심의 운동 서술 흐름으로 한계가 있다 지적하면서 그것을 깨기 위한 시도를 한다. 동학 운동의 공주하면 우금치(우금티)만 떠올렸던 나 같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동학 초기 지도자인 최제우, 최시형을 다룬 책이 있어서 &lt;최제우.최시형.강일순&gt;을 병행하면서 읽고 있다(강일순은 비록 구한말 증산교를 창시한 인물로 비록 동학과는 관련이 없지만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책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만든 배경, 그리고 동학을 만든 이후 개인적으로 겪었던 일들이 상세히 다뤄지고 있다. 최시형과 최제우의 연결 고리를 찾는 과정도 흥미롭다. 또한 앞선 책들과 관련해서 동학과 전봉준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이이화 선생님의 책들을 함께 비교해보며 읽어봐도 좋겠다.<br clear="all">]]></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373/13/cover150/89729151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373137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