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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선대스의 삶

터키에서 건너 온 동양판 <장미의 이름>. 노벨에 빛나시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은 살인 사건에 얽힌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각 장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중심 사건을 진술하는 구조로 사건을 가되 도무지 사건의 전말을 쉽게 넘겨 짚을 수가 없다. 놀랍고, 무섭고, 신비롭다. 
 
스타일의 문제 - 모네 전을 보고 왔다. 전형적인 한국사람인 나는 인상파 말고는 그림을 모른다. 인상파라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상파는 안다. 그거라도 안다고 말해야 하는 미술 교육 시스템에서 자나났기 때문이다. 모네는 모네의 그림을 그린다. 마네는 마네 식의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들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서 유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을 그리고 서명을 한다는 것은 진품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내 그림'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다. '이것은 내가 그린 그림 - 나의 스타일이다.'

반면 작품의 중심 인물 군을 이루는 터키 궁정의 세밀화가들은 서명을 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근본적으로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의 눈으로 왜곡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서명은 불경죄다. 가장 훌륭한 화가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화폭에 옮기는 사람이다. 스타일이란 신의 세상을 곡해하는 해악이다. 

성상의 문제 - 이슬람 사원에는 성상이 없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십자가도 몇 있고 성화도 더러 있고 나무로 깎은 예수상도 있다. 성상은 성물이긴 하나 인간이 만든 것이다. 감히 신의 모습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건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점차 성상을 섬기게 된다. 불상의 손 위에다 담뱃재를 털어도 되는가?  

그림과 신성 모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살인, 살인자의 추적이 놀랍고, 무섭고,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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