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히 노벨상을 수상하면 책도 많이 팔리겠거니 생각해 왔지만, 르 클레지오의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올해는 예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장편소설『조서』는 책 읽기의 쓴 맛을 톡톡히 보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난해한 기법이 난해한 채로 드러나기에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 건가 혼란스럽고 그의 지적 수준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지였으며, 번역가가 문장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런 억지스런 문장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노벨상을 달고 다시 발매된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 중에서 『오로라의 집』을 택한 것은 단연코 힘든 독서 과정 때문이었다. 이 책은 131쪽에 불과하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지 않다. 단편소설 두 개를 단행본으로 엮은, 대 놓고 장삿속을 드러내지 않고서야 이토록 뻔뻔하게 만들기도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책의 분량과 독서 시간은 비례하지 않는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출판사에서 흔전만전 시상하는 문학상 수상작 속의 시간과 같을 수 없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속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흐르고 때로는 아예 멈춰 버린다.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단번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전부 지워버렸고, 예전의 느낌과 현재의 느낌이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공백, 훼손, 갈 곳 잃은 답답한 거북함과 고통스런 느낌만을 남겨 놓았다.”
이 문장은 개발로 인해 변해가는 옛 동네를 묘사한 문장이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없다. 수사도 없고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도 없다. 하지만 이 문장은 분명 외부 세계를 적합하게 묘사하고 있고, 동시에 추억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런 문장들이 연결되며 책 전체를 끌어간다. 사건은 진행되지만 독서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독서가 행위가 아니라 상태가 되면 문장의 시각적인 깊이에 깜빡 정신을 놓기도 하지만, 어느 때부터는 책읽기가 힘겨워진다.
오로라의 집은 주인공 에스테브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자 처음으로 본 신비로운 집이다. 그 집은 놀이터이자 공포를 자극하는 장소이자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 줄 문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에스테브는 어느 순간 자신의 전부일 것만 같았던 그 집에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한 순간의 각성이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두들 알 것이다. 평범한 대화의 주제, 텅 빈 공허한 주제”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 에스테브는 자신 안에서 사라진 반쪽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것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오로라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상실과 향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과 의식은 너무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인간성 회복’ 유의 교훈적 가치로 마무리될 수 없다. 회복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겉모습이 바뀌는데 오로라의 집만 예전 그 모습일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이미 성장했고 반쪽을 잃었으며, 떠나간 반쪽은 기억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내게 있어 르 클레지오는 이 정도 두께가 적당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책을 덮는다. 하지만 전해진 감성의 깊이는 몇 권의 책을 읽은 것 같다. 이래저래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 수상 소감에서도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던데, 이 책을 인연으로 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이 깊어지는 독자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