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직선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그래프는 출생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시작하여 사망이라는 '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 점철된다. 저마다 다른 그래프이지만 삶은 그 누구에게도 예측가능한 형태의 직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처음 병에 대한 진단을 받으셨을 때부터 투병하시던 기간 내내 나는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실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힘든 항암과정 속에서 나날이 체력적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도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서도, 또 그 과정을 함께 이겨내야 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아버지와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치부하면서 이별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않더라도 적어도 마지막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은 주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불안정하게 움직이던 그래프는 갑작스럽게 꺾인 형태로 멈춰 섰다.
"우물쭈물하다가 그야말로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상황이 와버린 것이다. 이게 인생이다. 끝에 별게 없다.
심오한 깨달음이 오거나 50년 가까이 같이 살았던 사람과 마지막 인사라도 살갑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허망하게 끝이 나버린다." (p. 123)
삶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안정된 상태라고 느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미지의 것이 느닷없이 닥친다. 이렇게 질서가 무너진 혼돈 속에서 우리 삶은 현실부정과 절망,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되어 간다. 삶은 질서와
혼돈으로 점철되어 있다. 안정된 질서 속에 갑자기 혼돈이 찾아오기도 하는 반면, 모든 것을 상실한 듯한 절망적 순간에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도 한다. 삶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인생의 의미가 빛을 잃어가고, 절망과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 <즐거운 어른>의 이옥선 작가는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 있는 우리는 삶이 던지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체험을 통해 느낀 것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불안정한 환경과 수많은
변수들 속에서 우리는 유의미한 작은 결과에 기뻐하고,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들에 실망과 체념, 새로운 도전으로 채우며 삶을 만들어 간다. 이중에서도 작가가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키워드는 '상실'이다. 우리는 상실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인간은
매순간 죽음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다 종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실'과 '결핍'의
경험은 삶의 온도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공간 감각을 둔화 시킨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기도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하지만 어찌 됐든 현재의 내 것 같지는 않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상실과 결핍을 대면하게 될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들은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이란
저마다의 상황 속에서 그만의 역사와 고유한 존재 방식, 중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개개인이 켜켜이
쌓아올린 저마다의 사연들은 상실과 결핍의 기억을 머금은 채 조용히 빛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역사와 존재이유, 상처와 결핍을 가진 하나의 '섬'이다. 섬은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가진 특별한 공간이다. 수면 위 드러난 부분을 기준으로 보면 섬은 단절된 공간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으로 섬과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경계들, 그리고
그 수많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들... 서로의 고유한 존재 방식, 상실과 결핍의 기억들은 우리 각자를 섬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삶의 흔적, 아픔을 매개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이런
의미에서 삶이란 저마다 쌓아 둔 사연들로 섬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로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온기를 나누는 존재들이니 말이다.
저마다 개별적 삶을 살면서도
타인과 또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한 시대를 이루고, 그것이 되풀이되고 순환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를 구성하는 인간의 삶이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자리는 저마다 거리와
밝기가 다른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각의
별들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각기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별들은 인간의 가시거리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먼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별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해내지 못하고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군집된 별자리로 인식하게 된다. 동시대를
같이 호흡하면서도 온전히 현재를 살아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과거의 한때에 머무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기억을 넘어 미래를 향하는 것은 인간은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 (Kronos)' 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인 ‘카이로스 (Kairo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것인 동시에 미래를 꿈꾸고 호흡하게 하는 두번째 심장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 <위대한 개츠비> 中에서 –
<즐거운 어른>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상실과
결핍, 몰이해라는 인간의 한계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으로 한 조각의 진실과 삶의 의미를 구하려 애쓰는 '인간'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망하는 시선이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과거로 떠밀려 가는 현실의 삶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 감으로서 더 나은 삶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삶에 대한 체험적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작가는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 자체가 해피엔딩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happily ever after)'와 같은 동화 속 명제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동화를 읽는 어린이들에게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어른들의 사정이 고려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시작 (출생)과 끝 (죽음)이
있고, 그 사이에 수많은 선택들이 존재한다는 것? 삶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발적이고 실천적인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 책임이란 다름 아닌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받아들이며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일 것이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용기를 가지고 상황에 대응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공포가 상존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점과 선들, 그
수많은 가능성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까?
중요한 것은 상실의 두려움
앞에서 절망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단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발걸음을 내딪는것 아닐까?
누군가 그어 놓은 선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통해 진실의 조각에 가까워질 수 있고, 그 경계를
넘어서야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살아보니 인생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p. 114)'라는 작가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이 짊어져야 할 생의 무게가 있지만, 모든 일은 장점 혹은 단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단점이 상존한다. 즐거웠던 추억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아픔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시절과 떠올리는 것조차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절들을 거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그런 날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고, 현재의 어려움들도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갈 것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뿐하게 생각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이옥선 작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삶에 대한 아포리즘이다.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갈 것들이다.
그러니 인간끼리의 관계를 너무 심각해하지 말고 가뿐하게 생각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다." (p. 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