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서평단 참여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마음은 세계일주를 누리고픈 욕심은 엄청나지만 실상을 그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육아맘입니다. 대신 저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 비록 똑같이 반복되도 지루해하지 않고 열악해도 견뎌내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저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장점이 발현될 수 있는 이유는, 매순간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재미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이고 심지어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단조로운 일상이 세계일주 못지 않은 즐거움과 짜릿함을 선사해주기도 합니다. 또한 당연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쌓여서 여기까지 왔는지 알게되면, 그 당연함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 탈바꿈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반복적인 일상도 여행하듯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조롭지만 다채롭게 일상을 담은 에세이를 발견했습니다. 아니 소설이라고 해야 될까요? 에세이와 소설의 어느 경계에 있는 아이셰굴의 《인류학자들》입니다.

푸르른 초원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화롭고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른 포즈로 같은 곳을 향해 보고 있습니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책 표지 속 풍경은 이 책의 주인공 아시아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으로, 동물의 왕국이나 네셔널지오그랙 같은 대형 다큐멘터리가 아닌, 공원에서 사람들의 루틴을 지켜보며 이를 다큐멘터리로 담는 작업을 합니다. 사람들의 루틴과 규칙에 매료된다는 아시아. 아시아의 관점으로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 작가 아이셰굴 사바쉬

작가 아이셰굴 사바쉬는 튀르기예 출신의 작가로 미국에서 인류학과 사회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파리에서 남편과 아이와 살고 있으며, 영어로 소설과 에세이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 《인류학자들》을 보면 관찰자 아시아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살았고, 현재는 파리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그녀와 아시아는 똑닮았습니다.
>> 구성 및 내용

책의 구성은 단조롭습니다. 에세이처럼 글은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제목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똑같은 소제목이 반복됩니다. 특히 "공원에서'라는 제목이 많은데요. 이는 매일 공원에서 사람들의 루틴을 관찰하고 인터뷰하는 아시아의 관점을 보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소제목도 반복됩니다. 소제목은 똑같은데 내용은 다릅니다. 이는 똑같은 일상이라도 다시 들여다보면 다른 에피소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짐작케 합니다.
>> 감상평
에세이 같지만 소설인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 어느 나라에 각자 어느 국적을 가진 사람들인진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실 읽으면서도 계속 궁금했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관찰자 시점의 여주인공 아시아와 그녀의 남편도 마누도, 각자 다른 국적을 가진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으며, 그들이 타지에서 만나 결혼 후 정착했던 작은 집에서 조금더 넒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할 타이밍이 왔다는 걸 그들은 인지합니다. 그리고 도시와 도시 외각을 다니며 집을 알아보러 다니는 그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자국에서도 정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그들은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타지의 도시에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려 합니다. 확장이라기보단 자리잡아간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들은 타지에 온 외국인이여도,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시아와 마누에겐 친구들과 이웃이 있습니다. 아시아와 마누가 이사한 첫해에 만난 외국인 친구 라비, 유일한 현지인 친구 레나, 그들 집 두 층 위에 사는 테레자 할머니, 그리고 사라와 샤론, 폴까지!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친구들과 이웃과 함께하는 즐거움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에서 벗어나 아사아의 관점에서보면, 아시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으로, 사람과 그 주변을 다채롭게 경험하고 그들의 루틴과 규칙을 들여다보는 재미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일상을 촬영하고 그 일상에 담긴 소박한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탐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도시에 남아 일상의 규칙을 세우고 싶었다. p. 14
그게 내가 촬영하고 싶은 주제였다. 느릿느릿 여유롭게 빈둥거리는 하루. p. 19
위의 관점을 가진 아시아. 아주 소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학자 관점으로 보면 그 속에서도 다양한 세계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놀라웠습니다. 인류학자의 관점으로보면 일상은 절대 단조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편견의 장벽이 사라져서 더 다채롭고 광범위하며 심지어 새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인류학자 관점으로 관찰하려면 한 발짝 물러나서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없고 갈등으로 인한 감정적 타격감도 덜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그저 신기하다는 느낌만 남아있습니다.
단조롭고 심심하게 바라본 일상을 조금더 면밀하고 깊이있게 바라보면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의 여정을 즐길 줄 알게됩니다. 이 지루함과 이 단조로움과, 이 고통이 언제 끝나느냐 불평하는 것보단, 주어진 삶 아니, 내가 살고자 한 거처, 지역 혹은 다른 나라를 어떤 관점으로 볼지 고민해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연들이 누적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은 존귀한 것이며 절대적으로 무료하게 바라봐선 안됩니다. 존귀하게 바라보면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들도 존귀하게 보여질 것입니다.
타지의 이방인인 아시아와 마누. 그들이 정착해서 살아가야할 곳이 어디이며 정체성은 확립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소설을 통해서 알게됩니다. 자신들이 선택한 나라와 도시, 거기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소소하게 흘러가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삶이라는 걸, 그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문장 수집
p. 11 우리는 루틴 지키는 걸 좋아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 느꼈던 강렬한 설렘과 그것이 점차 퇴색되어 가는 것이 지겨워졌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확장해야 할 때였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삶의 기반을 다져야 할 때였다. 그 표현은 우리와 거리가 먼 말이 었지만 좀 더 안정적인 삶을 꾸려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p. 12 서로 마주 보며 식탁에 앉는 것은 일종의 이식이었다. 우리 삶에는 의식이라 할만한 것이 거의 없었따. 의미가 있는 의식이든 아니면 적어도 전통이나 국가,종교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담긴 의식이든. 그래서 이런 사소한 일상이 중요했다. 난 아침이면 꼭 마누와 함께 식탁에 앉곤 했다.
p. 14 매물로 나온 집을 보러 갈 때마다 도시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일과 휴식을 위한 공간의 배치, 물건을 보관하고 진열하는 방식, 우리와 너무나 다른 그들의 우선순위에 매료되었다.
p. 21 마누와 난 예전에 다른 곳에서도 살아보았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어딘가 우리가 삶에서 원했던 분위기와 조화로운 생활 환경이 있었다. 이 도시의 시간은 우리의 삶과 같은 박자로 흘러갔다. 우리는 이곳의 색감과 경계선, 장식, 동네 구성에 감탄했다. 아직 이 도시가 익숙하게 느껴지진 않아싿. 그저 익숙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린 이 도시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p. 31 나는 자율성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너무 빠르게 적응해버렸다. 자율성을 도덕적 가치이자 의심의 여지 없는 바람직한 상태로 여긴 것이다. 분명 가족의 눈에는 이런 내가 낯설다 못해 아예 남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p. 39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나는 인류학자의 눈으로 일상을 관찰하곤 했다. 사소한 상호작용도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인류학자의 관점으로 되새겼다. 복잡하게 얽힌 논쟁의 층을 분석하려고 할 때, 영상을 편집할 때, 특별한 행사에 가려고 옷을 차려입을 때마다 나는 인류학자의 관점을 떠올려 여기저기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살펴보았다.
p. 47-48 공원에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낯선 사람들의 루틴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사는 하루의 짜임새를 더 깊이 파고드는 질문을 하고 싶었다. 촬영을 계속하며 나 역시도 내 안에 오랫동안 잠재했던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정말 이상하고 고유하고 독특한 면이 있었다. 이런 고유함은 일상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p. 62-63 누군가의 삶에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 그것이야말로 내가 어떤 장소에 뿌리내린다고 상상했을 때 떠올랐던 감정이었다.
p. 77 아시아, 마누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엄마가 말했다. 결혼이란 부부가 함께 추는 융통성 없으면서도 복잡한 춤이며, 선을 넘는 순간 조화가 깨진다는 엄마의 결혼관에 나는 맞장구를 쳤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사랑관이라고, 마누와 내 관계는 단순한 예의범절 따위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p. 79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이 가져올 미래를 그려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요소가 있었다. 결국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p. 84-85 라비와 마누, 난 심리 치료라면 질색했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는 심리 치료가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자기 탐닉적인 헛된 행위라며 못마당하게 여겼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했다. 우린 심리 치료가 소비를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중략) 상담이 내담자 안이 어떤 퇴폐적인 부분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내담자는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죄책감을 버리고 삶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는 반복된 확신 탓에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사주려는 강한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상담을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p. 155 내가 젊다는 사실을 깨우친 건 충격이었다. 최근 들어 더는 내가 젊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음은 다른 시절, 그러니까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미래가 저절로 굴러 온다고 믿었던 시절의 전유물인 듯했다.
p. 159 몇 년 전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집을 얻었을 때는 우리 삶에 며칠만 머물다 사라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그 후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우린 지낼 곳이 필요한 친구의 친구들을 재워주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자주 저녁을 먹었다. 당시에는 그게 지극히 정상으로 느껴졌다. 낯선 그들과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늘 궁금했다. 마누와 나는 가끔 소파에서 재워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때 우리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는지 새삼 감탄했다.
p. 170 그 돈으로 우리는 대들보가 가로지르는 천장, 사용하지 않는 벽난로, 전망 좋은 창가 공간이 있는 그 집을 구매하겠다고 부동산에 말했다. 다른 집은 보고 난 후에 금세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우리 삶과 아무 상관없는 공간처럼 느껴지는 반면 그 집은 방문한 후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대들보가 보이는 그 집으로 이사한 뒤에도 변하지 않을 것들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