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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죽었다

북인시선 Bookin
'시詩는 죽었다'  
[유준 시집] 해설 - 백인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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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을 향한 시혼詩魂의 기원祈願


― 유준의 시세계 ― 


1. 시의 순간과 시적 운명


시는 언제, 어떤 환경과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하는가? 누

구는 괜한 질문이라 웃어넘길 것이고, 더러는 자신의 경우를

일반화하면서 긴 철학적 장광설을 늘어놓으려 들 것이다. 하

지만 이 질문은 자체로 순수하고,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시

작詩作의 내적 동기動機야말로 그의 시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은 매

너리즘에 빠졌다는 것이고,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것은

시작의 경솔함에 대한 반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899년 봄, 러시아의 광막한 평원에서 독일 시인 릴케는

“이제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고향을 잃은 일은 없으나 이 세

계 깊은 심연으로의 탐닉이 나를 고향 없게 하고 있는 것이

다. 이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체험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

이다. 그것은 이 황망한 세상이 지닌 훤소喧騷 속에서 고향을

잃은 외로운 사내의 감정에 걸맞는 일이다”라는 편지를 썼다.

물론 이 글은 그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었다는 점, 세기말

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후기 낭만주의라는 사조 등을 참조했

을 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게 되겠지만, ‘고향상실 의식’, ‘심

연에의 탐닉’, ‘원초적인 체험에의 열망’ 등은 오늘 현대에도

시사점이 적지 않다.


유준 시인은 첫 시집, 『시詩는 죽었다』를 통해 앞에서 던진

질문에 나름의 충실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인 비애와

분노와 안타까움과 염원이 뒤엉킨 ‘마음의 실타래’를 뭉치째

내던져 드러내면서, 시인의 ‘시의 순간과 시적 운명’을 고백적

으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적 수법(기교)이

나 장치 이전의 날것raw인 본래의 육성으로 우렁차게 막힘없

이 토해내는 패기와 긍지가 돋보인다.


시인詩人의 가슴은

밴댕이 소갈머리

바늘 끝만 하다가

대나무 속 같다가

바닷물 되었다가

여느 땐

우주도 들락날락

때로는 텅 비었다가

무엇이 꽉 들어찼다가

시인이란 요상한 님

참으로 기이한 님

장하다 했더니만

금세 주저앉는 님

어림없지만 귀한 사람들


― 「기이한 사람들」 전문


시인은 시인을 정의하면서,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을 시인

으로 정위定位하면서 한마디로 ‘기이한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

다. 그의 가슴은 “밴댕이 소갈머리/ 바늘 끝”처럼 좁고 가늘

다가 ‘여느 땐’ ‘우주’도 들어차고 “텅 비었다가/ 무엇이 꽉 들

어찼다가”하는 태허太虛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이란 ‘기이한 사람들’은 결국 “어림없지만 귀한 사람들”이

된다. 이 무한 긍정이 이번 시집의 주된 정서적 흐름이라 해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첫 시집인 만큼 더 상세한 해설이 필

요하겠지만, 유준 시인이 들려주는 결대로 따라 읽는 것 또

한 독자들에게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시집의 편제대로 ‘시혼詩魂 ― 향수鄕愁

― 현실 인식 ― 원초적 염원念願’으로 읽는 것 또한 그의 시

세계를 조망하는 하나의 회전문으로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2. 시혼이 불타는 시적 순간


시를 생각할 때, 가급적이면 개별 작품인 ‘시poet’와 추상

적 개념으로서의 ‘시poetry’를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생각이다. 물론 이것이 상하의 ‘층위層位’를

구분하자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작품이 시인의 시 의식을 반

영하면서 창조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시인의 의식과 인식의

흔적이 담겨 있게 마련이라는 일반적 이해를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유준 시인은 갑자기 찾아든 ‘시적 순간’을 다음과 같이 형

상화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던가 가물가물

무엇이 우악스럽게 날 낚아채더군

고향 푸른 집 큰딸이 신神 내려 무녀 되었다는데

갑자기 시정신詩精神이 들이닥쳐 번뜩해대니

나도 시신詩神 내려 시인 되려나봐


시인은 천작天作이라 타고나야 된다는데

굿판 무녀 촛불 들고 작두날 춤추듯

시혼詩魂이 들러붙어 떠날 줄 모르니

나는 시에 붙들린 게 분명해

내 삶에 이런 일 결코 없었지, 아마


― 「시인 되려나봐」 부분


명시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는 않

지만, 1연에서 “고향 푸른 집 큰딸이 신神 내려 무녀 되었다는

데”라는 일종의 단서에서 무언가 초인, 초자연적인 끌림이 내

력內歷으로 존재한다는 암시를 통해, 시혼의 들이닥침(정확하

게는 “시혼詩魂이 들러붙어 떠날 줄” 모르는 상황)을 운명적인

사건으로 암시한다. 사실, 그 원인을 굳이 유추해 본다면, “시

인詩人의 눈물이여/ 베개 속에서/ 또 울다니”(「시인의 눈물」)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비애와 절망, 분노와 한탄

이 오랜 세월 ‘눈물’의 형태로 용해되다가 결국은 그것이 ‘시혼’

을 불러들인 것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은 “세상에

생판 없는 재주에 다 늙어 시든 씨로/ 이 무슨 오만 잡짓거리

냐/ 누가 물어 말리거든/ 내 뒷짐 쥐고 헛기침하며 올곧게 말

할지니/ 나는 내 멋대로 자유하게 쓰노라/ 나는 고목될 망정

시들지 않노라/ 이렇게 될 만한 된소리 한 번 하”(「내 詩」)겠다

며 늦은 출발에 대한 나름의 변을 밝히고 있다.


유준 시인은 나아가 자신의 시작 태도와 방법을 작품을 통

해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에게 들러붙은 시혼의 절

실함, 즉 그것이 ‘천작天作’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나아가 “내 삶에 이런 일 결코 없었지, 아마”라는 고

백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겠다

는 의지의 남다른 피력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여, 네 지질한 시상으로 똬리를 틀어

달팽이 더듬이에 살짝 올려 놓으려무나

시어詩語가 덜컹덜컹 떨어져 가슴이 뛸지니

바로 이때, 반짝반짝하는 시어를 잡거라

떨어진 시어는 고운 체로 잘 흔들고 걸러

운율을 섞어 빚은 질그릇에 담거라


예를 들자면, 여느 시인들이 흔히 즐기는

잡다한 시어로 마구 덧칠을 해대면 꽃잎은 시들고

쪼잔한 시상으로 줄기를 무지 비틀면

잔뿌리까지 흔들려 시혼詩魂을 죽이나니


시어에 톤을 달아 강약을 주되

행간에 움직이는 시를 쓰거라

댕기머리 가시내 널뛰듯 춤추는 시를 쓰거라

운율이며 톤이 짝지어 춤추거든

뒤돌아보지 말고 시를 탈고하거라


― 「내가 나에게」 부분


시력 사반세기를 넘어선 필자지만, 근래에 보기 드물게 명

료하고 절박한 ‘시작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내가

나에게’라는 겸손한 외양을 하고 있지만, 시어의 조탁彫琢이

나, 시어의 경제성 따위를 무시하는 요즘 세태에 대한 따끔

한 질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가령, “여느 시인들이 흔히 즐기

는/ 잡다한 시어로 마구 덧칠을 해대면 꽃잎은 시들고/ 쪼잔

한 시상으로 줄기를 무지 비틀면/ 잔뿌리까지 흔들려 시혼을

죽이나니”라는 부분은 ‘욕망의 발화’라는 그럴듯한 포장 아래

시의 본령, 인간의 근원적 정서에 대한 탐색이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음악성 등을 마구 사상捨象하는 현상에 대한 정확

한 진단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시어가 덜컹덜컹 떨어져 가

슴이 뛸지니”나 “댕기머리 가시내 널뛰듯 춤추는 시”라는 표

현에서 드러나는 역동적인 설렘이다. 시혼에 붙들린 시인이

결코 마법의 주문 같은 자기 관념의 우물에 갇혀 있지 않고,

거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자기 감정의 지나친 표출을 지

양하겠다는 의지의 피력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점이 시인

의 시작법이 형상화된 작품에 대한 자기 변호가 아니라 시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고 볼 수
있다.


떠도는 풍문에

시는 죽었다는데

시인들 곡哭 소리는 들리지 않네

과연 소문대로 시는 죽었는가?


― 「시詩는 죽었다」 부분


유준 시인이 진단하는 시의 죽음은 크게 두 가지 양태로

드러난다.(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 이 글을 어렵게 한다.) 하

나는 독자와의 괴리에 의한 시의 파편화 현상과 관련된다.


“어찌 시인들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혼자만의 난해한

시를 생산하시어/ 시 독자들이 시를 떠나게 만드는가?”(「시詩

같은 건 죽어도 싸」)라는 질문에서 드러나는 바, 독자를 ‘무

지몽매無知蒙昧’하다 여기는 일부 시인들의 그릇된 태도에서

비롯한다. 따지고 들면 딸려 나올 뿌리가 너무 많지만, 어쨌

든 시인의 그릇된 선민의식이 시를 죽이는 한 요소임은 분명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대정신을 결여한 시인들의 자기

정의 때문이다. ‘헬조선’의 현실 앞에서 “시인詩人들은 보고만

있는가”(「금수저 군상禽獸猪 群像」)라는 질문이 함축하는 의미

처럼, 시 정신을 잃어버린 태도를 말한다. 총제적으로 “시는

죽었다는데/ 시인들 곡哭 소리는 들리지 않”는 현실을 비판적

으로 그려내고 있다.



3. 실향失鄕과 귀향歸鄕의 시적 순간


자기 언어, 모국어로부터 추방된 자는 역설적으로 고향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질감으로 보존하게 된다. 우리는 몸의 존재이면서, 더불어 마

음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이 ‘몸과 마음’을 거의 무의식의 차원

에서 고통스럽지 않게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언어’이기 때문


쑥향이 못내 그리운 우리,

봄볕 따스한 날

첫사랑 초심 찾아

뉴욕 한 켠

쑥밭으로 가자

쑥국새 구슬피 울던

고향 뒷동산이 아니면 어떠냐


― 「쑥개떡」 부분


나 지금

뉴욕 한 귀퉁이에서

짖는 까마귀 마주하고

무궁화꽃 보며

꽃멀미하고 있으니


― 「까마귀」 부분


우리는 언어로 사고한다. ‘쑥향’은 사전적으로는 ‘쑥의 냄새’

를 의미하겠지만, 이는 언어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기억의 비

극적 일면이다. ‘쑥향 → 쑥밭 → 쑥국새’의 연상은 결국 ‘고향

뒷동산’에 가 닿는다. 비록 ‘첫사랑 초심’을 찾고 있지만, 추방

된 자의 슬픔이 애잔하게 묻어난다. 또한, ‘짖는 까마귀’를 마

주하고 그것이 미국에서는 길조, 한국에서는 흉조라는 극명

한 문화적 차이를 함의하면서 견딜 수 없는 시적 자아의 슬

픔을 형상화한다. 이런 그리움의 극단은 간혹 “뒷말 오약골

오솔길 따라/ 참외, 수박 서리하던 운학리/ 한국이 그리운 겨

울밤이다”(「당신들 시방 어디서 무얼하오」)라는 직접적 언표

言表로 나타난다. 현실을 더욱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시인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늙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팔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았고/ 아버지 젊은 모습도

들어 있는 것 같아/ 오 년 후의 나도 보며 가슴으로 울었다”

(「헝아야」) ‘오랜만에 아버지 같은 형을 만’난 시인은 형의 얼

굴에서 과거와 현재를 한꺼번에 읽는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는 ‘혈육’이라는 끈의 건재를 증명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는 시간 앞에서 무력한 자아에 대한 확인이라는 점에서 중의

적이다.


실향에의 아픔이 깊어갈수록 귀향에의 기대는 오히려 멀어

지는데, 그것은 그리움과는 상반되게 진행하는 현실의 사태

들이 끊임없이 시인의 정신을 건드리고, 심지어 의미 없이 아

프게 하기 때문이다.


남남南男아 북녀北女야

한강 대동강이 마르고

백두산 한라산이 닳도록

사랑하는 금수강산이 아니냐


동강난 허리에서 무슨 힘이 솟더냐?

건너지 못하는 강 차라리 말라버려라

오르지 못하는 산 차라리 무너져버려라


애오라지 뼈 속 저린 아픔만 간직한 채

이 깜깜하게 막힌 강산이 지질이 민족이

등 돌려 갈라서서

서로 침 뱉는 조국이여

이 기막힌 구질구질이

슬픈 역사의 반쪽이

어찌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다더냐


― 「남남북녀南男北女」 전문


제한된 삶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유를 전개하는 것은 예

나 지금이나 지난한 일이다. 더욱이 이를 특정 형태의 글로

공표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여

기서 굳이 하이데거의 ‘공간과 장소’ 따위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언제부턴가 우리 시는 당위적 진술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시인이 자기 무

의식과 관념을 궤변으로 늘어놓는 자로 전락한 것과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유준 시인은 예의 올곧고 사심 없는 목소리로 한반도의 현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질책하고 있다. 이를 공명심의 발로로

치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

라는 강한 결속을 갖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지구상에서 오

직 남북만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 언어

적 통합이야말로 시인에게는 귀향의 염원이 조속히 실현되는

길일 것이고, 섣부른 시들이 교만하고 현란한 시어로 치장한

채, 지속적으로 독자를 질식하는 행위도 종식할 수 있을 것
이다.


4. 시혼詩魂에서 시마詩魔로


유준 시인이 이번 시집, 『시詩는 죽었다』에서 드러낸 여러

문제점들은 현 한국사회의 시사詩史나 시의時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유의미하고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자기 정위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쉽게 예상할 수는 없지

만, 창조자로서 시인의 위상과 관련하여 시마론詩魔論을 소개

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바람이 알까

안개가 어디서 와

어디로 홀연히 흩어지는지

들풀이 알까

여름 한낮 끓는 볕이

왜 꽃잎을 떨구는지


바람은 안다

들풀도 안다

시인은 아는 체한다


― 「시인은 아는 체한다」 전문


주지의 사실이지만, ‘자연의 이법理法’과 ‘신의 섭리攝理’ 앞에

서 시인이란 존재는 그저 좀 ‘아는 체’하는 허풍쟁이에 불과

하다. 시인이 밝혔듯 “그래도 시인詩人은 사람이”(「시인은 사람

인가」)기 때문이다.


시마는 시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한다. 이 귀신이 몸에 붙으

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온통 시에 쏠리게

된다. 시를 쓰는 사람은 대체로 이 귀신을 맞이해서 앓아본

경험이 있다. 고려 후기 문신 이규보는 시마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

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

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

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잡

초가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

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

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

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다.”


이 글을 하나의 증상으로 읽은 것인지, 반어로 읽은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유준 시인은 이미 ‘시

혼에서 시마로’ 이행했거나, 아니면 그런 자기도취적

행로를 결단코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

실은 시인이 오래도록 시작을 ‘천작天作’으로 받아들여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란 사실이다.


백인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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