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은 눈이 참 자주 내린다. 나는 추운 건 좋은데 눈 내리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 팍팍팍 빠르게 걷고 싶은데 눈이 오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슬로우모션처럼 걸어야 하는 게 별로다. 그래서 올겨울에는 산책을 많이 못 했다. 그래서 살이 찌기 시작한 건가. 나가서 걷고 싶은데 길이 너무 질퍽거려서 걷기가 참 애매하다.
창밖을 보다가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시리즈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 하면 캐나다, 캐나다 하면 가마슈 경감 시리즈라는 단순한 발상이다.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여름이 배경일 때도 있고, 겨울이 배경일 때도 있는데 나는 이 시리즈와 찰떡궁합인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한다. 스리 파인스(사건이 주로 벌어지는 마을)에는 눈이 내려줘야 제맛이다.
눈 내리는 날, 스리 파인스의 비스트로에 모인 동네 사람들. 그들은 카페오레나 핫초코를 한 손에 들고 정답게 대화를 나눈다. 물론 살인 사건 이야기일 때가 많지만ㅋㅋㅋ.
【이번 사건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스리 파인스에서 늙어 죽는 사람은 없는 거야? 살인마저도 평범하지 않잖아. 그저 한 대 후려치거나 서로 찌르거나 총이나 몽둥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다. 언제나 난해했다. 복잡하기까지 했다. 전혀 퀘베쿠아답지 않았다. 퀘베쿠아는 거침없고 명쾌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얼싸안았다. 누군가를 죽이겠다면 머리를 후려치면 될 뿐이었다. 퍽. 끝. 유죄. 다음. ‘이건가?’, ‘이게 아닌가?’ 따윈 없다. 빌어먹을.】
스리파인스를 묘사하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웃기고 좋다ㅋㅋ. 나야 소설이니까 읽는 거지만, 진짜로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매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동네를 다 떠나고도 남지 싶다. 작고 아름답지만 너무나 무서운 마을...그곳이 스리 파인스다.
만약 살인 사건이 없다면 그런 마을에 살고 싶느냐 하면 그것도 글쎄. 생각은 좀 많이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도시의 익명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작은 마을, 작은 공동체가 갖는 폐쇄된 분위기를 못 견딜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리 파인스를 너무나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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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마다 벌어지는 같은 주제의 대화였다. 해변으로의 여행 상품 비교, 캐리비안 크루즈 여행 상품 고르기, 산 미겔 데 아옌데와 카보 산 루카스, 또는 바하마 대 바베이도스에 대한 논쟁. 끝을 모르고 내리는 눈과는 거리가 먼 이국적인 장소들. 하지만 여행이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실제로 떠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가브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머나, 클라라, 피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의 이론은 달랐다.
"다들 게을러터져서 그런 거야."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가브리는 카페오레를 홀짝이며 시선을 벽난로 속 타오르는 불길에 둔 채 익숙한 리듬을 타는 익숙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비스트로 안을 둘러보았다. 대들보, 넓은 널로 깐 바닥, 중간문설주가 달린 창문, 통일성을 무시하고 배치된 편안하고 오래된 가구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스리 파인스보다 따뜻한 곳은 없으리라.】
현실에서는 이런 마을에서 살아볼 일이 없어서 그런 건지, 루이즈 페니 소설에 등장하는 스리 파인즈의 분위기를 너무 사랑한다. 특히 겨울 배경 문장들이 좋다. 바깥이 너무나 춥기 때문에 실내가 대조적으로 더 아늑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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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고, 이따금 멈춰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입김을 불어 가며 대화하는 모습이 꼭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말풍선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몇몇은 카페라테를 마시러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향했고, 몇몇은 신선한 빵이나 과자를 사러 사라네 블랑제리 빵집으로 갔다.】
【피터와 클라라는 비스트로에 가는 동안 마주친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웠다. 두 사람은 개나 고양이가 물어뜯곤 했던 낡은 털모자 대신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들어있었던 새 모자를 쓰고 있어서 옛 모자에 익숙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들은 겨우내 모자에 달린 털실 방울을 가만히 놓아두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울 대신 양초처럼 머리 꼭대기에 심지만 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만약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마을에 가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면 나는 겨울의 스리 파인스를 택해야겠다. 눈발을 해치면서 올리비에의 비스트로로 들어가 카페오레를 주문하고 머나의 헌책방에 들러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추천받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눈 오는 겨울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