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우연한 만남

엄마는 귀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다. 십몇 년 전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왼쪽 고막이 터졌었는데 그후로도 계속해서 염증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최근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더니 왼쪽 귀가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아예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에 갔더니 염증이 너무 오래 되었다며 일단 수술은 해보지만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며 일단 수술을 해보기로 했다. 오늘 입원해서 내일 수술하고 내일 모레 퇴원한다.


간호간병통합병동이라서 보호자가 따라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나는 집에 남아서 또 짐 정리를 했다. 요즘 내 일상은 정리가 뒤덮었다. 인스타만 켜면 온갖 정리용품&정리꿀팁 릴스가 뜬다. 오늘의 타깃은 현관. 겉으로는 멀쩡해보이지만 신발장을 열면 카오스다. 모든 물건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그것도 너무 많이.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사시는 이 집에 우산이 스무 개가 넘어간다. 아니, 서른 개? 그런데도 비가 와서 급하게 하나 집어서 나가면 안 펴지기 일쑤다. 거기다가 구두 신을 일이 아예 없는 상황인데도 구두약과 구두솔이 넘쳐난다. 여기 이사 와서 신발장 서랍에 던져놓고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구두약과 구두솔은 전부 빼서 박스에 담아두었다. 한두 개만 남기고 전부 버릴 예정이다. 우산도 하나씩 다 펴보고 고장난 것들은 버릴 거다. 부모님이 이 집에 안 계시는 동안 내 맘대로 정리할 예정이다. 어차피 아무도 내가 정리한 걸 모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공간에 손 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좋게 말해 개인적이고, 나쁘게 말해 남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서 남의 공간을 정리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리하지 않으면 이 상태 그대로 유지될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사부작 사부작 정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현관, 내일은 장농, 모레는 주방 차례.


부모님이 쌓아둔 짐을 정리하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 같다. 하루는 내 짐도 다 갖다 버리고 싶다가, 또 하루는 미친듯이 뭔가를 사고 싶다는 욕망에 허덕인다. 아무래도 미쳐가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상담했다. 남편은 나보다 몇 년 전에 이 과정을 다 겪어본 사람이다. 남편은 나보고 자아를 버리라고 했다. '이건 왜 이러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런 의문 자체를 갖지 말라고 했다. 기계처럼 정리를 하라고 했다. 자아를 버린다는 것.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위한 즐거움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역시 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근처 도서관에 책배달 신청을 넣었고 어제 한 권, 오늘 세 권 찾아왔다. <나는 걷는다 1>은 예전에 읽었기 때문에 2, 3권만 빌려 왔다.

알라딘 드립백으로 커피를 내리고 치즈케이크를 한 조각 꺼냈다. <나는 걷는다2>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부서지기 쉬운 순간은 나와 세상 사이에 화합이 자리 잡는 시간으로, 사람들은 그 시간을 연장할 수 없는 걸 아쉬워한다. 슬픔이 다시 찾아오는 때에 떠올리게 되는 기분 좋은 순간들은 찌르레기의 비행처럼 덧없고 강렬한 순간이며, 우리 인간의 부조리한 삶에서 훔쳐낸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행복을 찾아서 나는 떠난 것이고, 2000년 이상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실크로드는 그러한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으로 보였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실크로드를 끝까지 횡단하거나, 적어도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고 싶다. 난 지금 예순둘인 데다 계속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에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건강이 허락할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이 왜 이런 생고생을 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채 험한 길을 걷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뭐라고 모든 일에 '왜, 어떻게' 같은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걸까.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책에서 향기가 났다. 아까 도서관에 있는 책 소독기를 이용했더니 그 향기가 아직도 책에 짙게 배어있다. 나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만 이렇게 독기를 뿜어내서는 곤란하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아까 엄마한테 살짝 짜증을 냈는데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상냥하고 착한 딸로 돌아왔다. 실크로드를 걸어서 횡단한 사람의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부모님댁 아파트 단지는 매주 목요일에 분리수거를 한다. 신발장에서 꺼낸 더러운 신발상자들은 아직 버리지 못한 채로 현관에 쌓여있다.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책을 읽는다. 적어도 오늘만은 현실을 잊고 모래바람 날리는 중앙아시아 스텝을 걷고 싶다.


【그래,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내가 발견할 세계가 내가 떠나온 세계보다 못한 곳인가? 도시를 뒤흔드는 불안한 광기, 일상의 스트레스, 발동기와 같은 욕망, 모든 책략의 최종목표와 같은 권력, 미덕으로 격상된 공격성······ 이런 것들이 내가 방문하게 될 마을보다 안전한 것인가? 나는 인간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세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걸음으로써 시선을 올바른 차원으로 되돌리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익힐 수 있다. 걷는 사람은 왕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는 고통을 당하지만, 좀더 잘 살기 위해서 조립식 소파보다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 나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제약과 두려움에서 내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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