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사회의 의식을 지배한다.
한 언어가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 세계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알아보려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하면 된다. 본의 아니게 영어로 작문하는 처지에 빠지면서 나는 영어와 한글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영어는 직설적인 언어이다. 모든 에세이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두괄식 형태였고 형용사와 부사를 남발할 경우 글이 모호해 졌다. 반면 한글은 본의를 숨기고 조심스러워하는 우리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언어일 수있다. 우리의 속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문자가 한글이었다.
자연스레 내 삶 속에 밀착한 한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은 영어로 생활할 수 밖에 없었던 얼마간의 시간에 겪은 경험과,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정명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 덕분이었다.
집현전에서 발생하는 학사의 죽음을 채윤이라는 중인이 추적하기 시작한다. 채윤의 시선을 좇아 나가던 독자들은 곧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라 일컫는 세종 조의 구중 궁궐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음모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하게 '고군통서'란 금서를 둘러싼 이야기라 생각했으나 어느새 소설은 독자적인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 설득력은 세종의 개혁 정치를 둘러싼 갈등 관계에서 비롯한다. 사대선린 정치와 조선의 자주성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발생한다. 그러나 가장 큰 갈등은 경학을 숭상하는 보수파와 실용을 숭상하는 이용후생학파의 대립에서 발생한다.
역사와 허구가 뒤범벅이 되어 어느 것이 역사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작가의 재주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이 소설은 그 어느 픽션보다 개연성을 지녀 독자를 사로 잡는다. 채윤과 소이의 애정선은 작가가 좀 비약을 한 듯 싶고 사실 모든 희생자들이 증거들을 질질 흘리고 다녀 미스테리 구조로는 취약함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주인공을 제외한 주요 인물은 모두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하기에 범인을 향한 소설의 견인력은 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글을 대상으로 한 작가의 치밀한 취재, 그 취재를 통해 나온 엄청난 정보와 역사의 재해석은 독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이 책을 돌려 읽으며 스스로를 세종과 집현전 학사로 여기며 위안을 받았다는 풍문이 있었다. 그들이 과연 이용후생을 목표로 한 실용주의자였는지 이상과 이데아에 충실한 보수파인지 나는 모호하게 느끼고 있다. 여하튼 이 소설이 그 누군가에게 위안을 주었다면 그것은 또다른 장점이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