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방송일은 하는 데 제일 어려움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종종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고관대작에서 조직폭력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계급, 성격을 지닌 사람과 만나 대화하고 설득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데 제일 큰 어려움은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일이라 대답할 것입니다.
수많은 드라마가 존재해 왔으나 사실 기억에 남는 새로운 캐릭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캐릭터들은 한 드라마의 영속적인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네멋대로 해라]의 캐릭터들이나 [환상의 커플], 영화 [공공의 적]등은 그런 새로운 캐릭터들은 많이 창조한 예이라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의 경우도 이런 캐릭터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될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악인의 모습을 만드는 것은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를 만드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범인은 극 전체에 새로운 색깔을 입히기 때문이죠.
미야베 미유키는 이런 면에서 또 새로운 성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새로운 성격의범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범죄의 이유 또한 새롭습니다. 뿐만아니라 사건을 경험하고 관조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그 다양한 캐릭터의 렌즈를 통해 극의 연쇄 살인범을 추적합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접근 방식이 다른 작가와는 판이합니다. 주인공과 악당을 정하고 악당이 징벌을 받는 과정을 주인공의 행동과 시선을 통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드라마의 플롯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미유키는 이 과정이 남다릅니다.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사건의 전모를 다각도에서 조망합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가해자, 가해자의 가족, 피해자, 피해자의 가족, 경찰, 사건을 취재하는 르포 기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친구, 사건과 별 관계없이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들의 시선으로 작가는 독자에게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합니다. 철학적 깊이를 맛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화된 [모방범]은 소설의 재미를 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캐릭터들의 시각으로 드라마를 쫒아가는 구조는 영화의 내러티브와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비록 전화번호부 두께를 넘어서는 3부작의 분량이지만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밌습니다. 범인을 잡나 못잡나의 단순한 구조를 넘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극적으로 입안을 톡 쏘지는 않지만 그 맛의 여운이 가슴 속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이런 맛에 독서를 하는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