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아이러니
박용준
영화 <깃> 중에서
“행복, 그것은 현실이란 말처럼 환상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미친다. 환상적이 아닌 어떤 것도 우리를 미치게 하지 못한다.”
- 최인훈, 『역사와 상상력』 중에서
무엇이 그대를
미치도록 가슴 뛰게 하고, 죽도록 살고 싶게 만드는가.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다.
즉, 삶의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낸 후에만
비로소 행복이라는 지평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대개 삶이란 거저 살아지는 법이 없기에,
죽도록 아파야만 조심스럽게 다가올 희망을 품을 수 있고,
미치도록 살아야만 가까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이든 삶이든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심연의 본질에 닿을 수 없기에,
환상적인 것들에는 때론 미쳐봐야 한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그리곤 곧장 이별하지 않았던가.
“S 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 욕망을 고갈시키지 말 것, 오히려 더 많은 부드러움과 에너지로 재생시킬 것. 내 눈앞에 있지 않으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다. ...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희망이 조금,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 아니 에르노, 『탐닉』 중에서
환상 없는 삶은 금세 지루해지고,
희망 없는 삶은 쉽게 나태해진다.
그렇기에 환상이 ‘있으면 좋은 것’이라면, 희망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환상은 때론 우리를 미치게 하지만, 과하면 일상이 시시해지기 때문이고,
희망은 오지 않을 듯 아득하지만, 서서히 삶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에 대한 환상을 더 깊고 더 애틋한 설렘으로
조심스럽게 탈바꿈하는 것.
그래서 희망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여도 쉽사리 놓지 않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사 실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넘어서는 것. 그래서 사랑은 때때로 환상적이며, 그것이 환상적이라 하더라도 충만한 실감을 안긴다. 환상과 실감이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장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상상력이 없다면, 그 사랑은 진부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를 지치게 한다. 상상력은 일회성의 이벤트를 하는 기획력이 아니다. 그것은 연인끼리 서로의 정체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와 몸짓의 나눔이자, 언어와 몸짓의 생성이다.”
- 한귀은, 『이별리뷰』 중에서
사랑의 희망, 혹은 희망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환상적이지만 충만한 실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판타지아(phantasia)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영혼에 일어나는 정서적 반향을 뜻한다.
사랑이란, 연인과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영혼의 미묘한 떨림이 아니던가.
연인의 살과 피부가 하나의 사실이라면,
서로의 살과 피부가 맞닿아 만드는 것은 환상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니 환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우리의 사랑/삶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
“희망은 하나의 비약이고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다. ... 실제로 그것은 예언적인 힘이다. 희망은 존재할 것이나 존재해야 할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희망은 아주 간단히 ‘그것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할 뿐이다.”
- G. 마르셀, 『존재와 소유』 중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믿는 것. 즉, 희망이라는 환상에 대한 신뢰는 꽤 중요하다.
이 예언적 믿음으로부터 희망은 도래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신약, <로마서> 8:24)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기 보다, 바랄 수 없음에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결국 삶도 사랑도
그 본질은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꿈꾸는 희망이란 분명
환상(적인 것) 그 자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