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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이
  • 서경식 다시 읽기
  • 권성우 외
  • 16,200원 (10%900)
  • 2022-02-19
  • : 422

분명 바쁜 나날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퇴직 전에 기대했던 여유로운 일상이 아니라,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는 심경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70년 인생 중에서 대학이라는 곳에 소속했던 20여 년의 짧은 기간이 오히려 나 자신에게는 예외적인 시간이었던 듯한 느낌이 든다. 원래 내가 처해 있던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와 버렸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321)
나는 옛 식민지 종주국의 majority 사이에서 태어난 minority, 분단국가의 ‘재외국민’, 비전향 정치범의 가족이었다. 이렇다 할 기술이나 능력도 갖추지 못했고 험한 노동을 견딜 건강한 육체도 없었으며, 그저 책에 빠져 있을 뿐인 ‘생활 부적응자’이고 ‘결격자’였다 (지금도 그렇다). ‘고독’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 그랬던 젊은 날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흘렀다. 그때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대로 죽었어도 좋았으련만,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다. 5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젊은 날의 망상이 옛 모습 그대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 나를 포함해서, 옥고를 치렀던 두 형, 소녀 시절부터 부조리한 운명에 상처 입었던 여동생, 한과 슬픔 속에서 절망한 채 세상을 등진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상처는 지금도 치유되지 않은 상태다. (322-323)
대학 연구실에서 철수한 장서를 정리하고 있자니 ‘언젠가는 읽어야지’ ‘이것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구해 놓고 손도 대지 못한 서책과 재회한다. 하지만 그런 책을 꽂아둘 공간도 없으며, 지금부터 다시 공부할 시간도 체력도 내게 남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겠다. 읽어야 할 책도 못 읽고, 알아야만 하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적당히 둘러대며 살아왔는가. (323-324)
본의 아닌 오해를 받은 채(또는 오해를 안긴 채), 이제는 그 오해를 풀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도 있다. ‘그때 한 마디라도 더 건넸으면 좋았을 텐데’ 라든가, ‘어째서 한 발짝 더 다가가 따져 묻지 않았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묻다가 ‘아,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도 한다. 소식이 끊긴 사람, 마음을 다쳐 정신적으로 아파하는 사람, 병마나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나야말로 그렇게 되었어야 했다고까지 생각한다. 거듭해 온 실패, 과오, 죄의 기억만 가슴속에 쌓여 간다. ‘손을 쓸 수 없었다’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운운하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나를 본다. (324)
졸저[『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를 저자가 구구절절 설명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마디만 허락된다면 식민지 지배, 전쟁, 군사독재, 이산 등 민족사가 안겨 준 분열증적 상황에 질식할 것 같았던 내가 토해 낸 ‘한숨’에 적지 않은 분들이 공감해 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326)
우리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여행했습니다. 그는 무서운 꿈을 자주 꿉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을 때는 어머니가 꿈에 나와서 "너는 참 약삭빠르구나"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잘 알고 계신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괴로워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어머님이 했을 리 없는 말들입니다. (316)
나는 서경석 씨와 만나서 가치관과 생활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알게 되는 것, 배우는 것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지난 총선거에서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수준으로 자민당이 압승했습니다.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다시 찾아오는 걸까요. 그런 날과 맞닥뜨린다면 피해를 입고 싶지 않습니다. 동시에 지금도 일본인으로서 가해의 역사적 책임을 안고 있는 저는 다시 가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저를 지우고 싶습니다.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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