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를 처음 접한 것은 일전에 도서관에서 그의 <창조와 타락>을 빌려보고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됐던 창조와 타락이었는데 본회퍼가 서두애서 창조에 관해 말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성경이 처음에 이 태초를 말함으로 독자를 화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이다. 거센 물결이 인간을 덮치듯이 말이다.
그 때 다 읽지 못한 <창조와 타락>을 복있는 사람 출판사의 역간을 통해 다시 접해본다. 둘 다 양장이지만 이번에 출판된 것이 더 아담하고 디자인도 세련됐다.
창조와 타락이라는 주제는 늘 나를 사로잡는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성경에 대해 말해준다고 할 때도 나는 늘 창세기 1장에서 4장을 반복했던 것 같고 그 안에서 헤맸다.
누구나 들어본 이야기고 또 혹자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일텐데, 막상 창조와 타락의 심층에 접근하면 스스로의 무지를 토로할 수 밖에 없다. 쉬운 이야기같지만 실은 어렵다.
본회퍼의 책을 일별하면서 이전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 그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그의 사색과 통찰에 감복한다.
선악, 토브와 라,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 본회퍼는 선악의 개념을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볼 것을 말해준다. 다만 악의 기원문제나 이유 등에 대한 사고를 지양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대목에서 본회퍼가 좋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도 같지만 한편에선 독자의 상상이나 이해를 제한한다는 느낌도 든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분열된 세계 속에 산다는 것, 인간 존재의 분열이나 불화를 내포한다는 그의 해석이 좋다. 범죄함으로 인간은 분열된 세계에서 독존하며 그 이후의 인간 행위란 것이 결국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인데 그것은 괴로움을 동반한다. 인간이 즐거움을 추구하고 생명을 추구하는 행위도 결국 이런 분열 극복의 결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형적이고 불완전하다.
부끄러움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분열, 세계 일반의 분열, 인간 자신의 분열을 알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타자를 더는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타자를 병적으로 갈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27쪽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 및 하나님처럼sicut deus 된 인간과 격돌한다.........
sicut deus는 선과 악의 분열에 기대어 살아가는 창조주 인간을 가리킨다. 146쪽이처럼 토브와 라로 분열된 상태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서 맨 먼저 나타난다. ..........그는 타자를 더는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에게 맞서는 존재로 대한다. 159-160쪽
아담과 그의 타락을 줄곧 예수라는 제2아담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본회퍼에게 창세기 1-3장은 창조론이면서 기독론이다.
어떤 논의는 더 깊이 있게 진행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