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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筆
















지난 만남에서 순천행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진기행>이 곁따라 나온다. 벗이 정확한 맥락과 이야기 순서를 짚어준다. 나에겐 안개처럼 흐릿한 기억만 남아있다. 비교해서 김승옥의 종교귀의나 이후 일들의 단편들의 기억이 더 강하다. 저자의 감수성 탐지능력에 놀라워했던 일도 떠오른다. 2010년 목포공장 발령을 받아 관할지인 순천을 들르면서 읽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2016년 포항에서 순천행 기차를 타고 6시간에 걸쳐 다다라 하룻밤을 묵고 온 적이 있다. <치자꽃>이 무척 인상깊고 산책의 흔적이 아련했다. 


그때도 지금의 나를 의식하고 있던 모습들이 글 가운데 읽힌다. 몸밖을 나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습말이다. 무진을 닮아있다.  어젯 밤 TV문학관  149분 분량의 박병우극본의  <무진기행>을 본다. 소설처럼 흐릿하지 않고 적나라하다. 속속들이 들여다볼 정도로 자세하다. 1981년 작품인데 보다나니 봤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사후지식없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본 것이다. "말이 말을 만들어 어떻게 갈지 몰라 편지를 쓰고자 했다."고 윤이 역으로 쫓아온 음악교사인 인숙에게 미안하다며 한 말이다. 사랑보다는 출세를 결심한 주인공은 "열렬히 사랑한다. 곧 불러올리겠다."고 하는 말을 하선생님은 말이 말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직감하고 뼈를 찌른다.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순천 갈대밭 방죽길을 지나 목교에서 속물임을 이미 안 인숙의 서울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받아쳐 "사랑이란 너무도 강하고 강해 인숙은 끝내 서울로 오고야 말 것."이라고 말풍선을 달며 와락 껴안는다. 


같은 책과 작품이지만 그때 그때 읽어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십여년 전 묵었을 땐 김승옥문학관과 국가정원 순천시내와 동천 일대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번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한 기억을 안고 돌아온다. 뭔가 끌리게 하고, 뭔가 풀리게 하는 것이 없지 않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숙을 흠모하는 국어교사와 탈출하고자 서울로 향하는 모든 끈을 부여잡는 인숙은 친구 변호사에게도 이 연정의 편지를 보여주지만 정작 그 변호사를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출세의 도구로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 그저 심심풀이인 셈이다.


작중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료하고 심심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일상과 닫힌 공간의 안개는 더욱 짙어진다. 가난이 품위를 잃어버리게 하고 부가 힘을 가져다주는 단순한 현실의 힘만 믿는 인물들은 위태위태하다. 미치고 죽고하는 인물들, 죽고싶었던 과거들이 한꺼번에 교차된다. 어쩌면 지금은 그때와 여전하고, 더 미치겠는 건 미치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무진을 떠난 이들에게 출세는 있을 지라도 삶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결국 밖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몸짓 삶짓이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여기를 지긋지긋해한다. 무진은 다시 쓰여질 수도 있는지도 모른다. 찻집 사장님도 문학 재능도 감수성도 살아숨쉬는 강물과 거리도 윤기로 번쩍일 수도 있는지 모른다. 피와 살. 육화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삶들은 처참하다.


치자꽃 ▼

 

치자꽃


안개가 걷힐 듯
햇살에 도망가듯 잡혀

안개에 잠길 듯
고개마저 떨군 채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내 앞에선
흐린 바다
네 앞에선
흐린 하늘

뚝뚝 흘린 노란 빚방울

네거리
하체가 치여
두 발을 끌고
두 팔로 허둥거리는 고양이

안개의 도시
안개의 낮과 밤

안개에 잊혀가는 도시
안개에도 살아내는 향기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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