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주문을 작은 책방에 넣었지만, 궁금하다. 가까운 도서관 들러 <프랑켄슈타인>과 <메리 셸리>라는 검색어를 넣어본다. 출력한 자료위치안내를 보니, 843.이 아니라 982.02 << 1816년 여름, 우리는>>이라는 책도 있다. 이건 뭐지라고
그렇게 찾은 책을 대출하여 앉는다. 가벼운 최근 책이 손에 들어온다. 퍼시 셸리와 이종 사촌과 유럽을 여행한 기록이다. 그 유명한 바이런과 함께 말이다. 영국 도버에서 시작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등을 여행한 기록이다.
그리고 잠깐, 본론으로 들어가기 앞서 삽화가 너무나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패브릭 조각, 인물의 형태는 작업하고 싶던 것들도 갖고 있어 놀랍다 싶다. 아래 다른 책의 삽화, 버니 라이트슨의 작품도 놀랍긴 한가지.
사실은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작품을 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 저자란 걸 몰랐다. 남편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관심밖에 있던 작품인데, 아래의 <자율적 테크놀로지>의 서술 말미부분에 테크닉, 기술정치의 문제를 얘기하며 정리하는 셈치고 묘사하는 것이 이 프랑켄슈타인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만든 것인지 섬뜩한 공포에 눌려 외면하는 모습은 정작 애초의 과학의 욕망과 관계없다. 시체와 죽음을 너머서는 열정이란 집착에서 버려진 것들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아이러니. 그것에 눌려 그가 만든 피조물을 철저히 외면한다.
피조물 역시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 창조주에 대해 어떻게 살아내야하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서로의 결핍이 가져오는 원한과 복수는 거울처럼 한 쌍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옳았다고 하면서 결말을 향해가는 저자의 서사는 그것이 한 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죽음 뒤에 읊는 말, 다른 방법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서로.
이는 남은 인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틀라스'를 전시하고서도
스스로 되묻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볕뉘
낯선 곳의 여행이 프랑켄슈타인의 묘사의 대부분이다. 표현력은 갇힌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하는 곳들에서 스며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고 싶다. 여기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