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木筆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헤겔의 비유로, 철학이 이미 역사로 굳어진 것만을, 즉 기존의 것만을 인식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 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이 그것이 가진 회색을 다시 회색으로 덧칠하기만 한다면 생의 모습은 낡아 버리게 되고, 회색을 그대로 두면 젊어지지 못할 것이며 다만 인식되기만 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릴 부렵에야 비로소 비행을 시작한다. 헤겔은 철학이 앞으로 도래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회색으로 덧입힌 회색'은 '기존의 것'이 지닌 색이다. 철학은 돌이켜 생각함이지 앞서 생각함이 아니다. 그것은 전망적이지 않고 회고적이다. 이와 반대로 희망의 사유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을 본다. '새로운 태양이 뜨는 아침의 닭 울음소리, 세계의 젊어진 모습을 선언하는 것이다. 117-118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본질의 로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이 동트는 광채를 볼 눈이 멀어 있다. 희망의 사유는 인식의 초점을 미래로, '기존의 것'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옮기며, 본질의 시간성을 나타내는 항상 이미에 아직 아님을 대비시킨다.


 블로흐는 회색에 희망의 색인 파란색을 대비시켰다. "먼 색인 파란색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적인 것과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괴테는 파란색을 '끌어당김이 있는 무'로 정의했다. 파란색은 우리를 매혹하고 갈망을 일깨우는 '아직 아님'이다. 파란색은 우리를 먼 곳으로 끌어당긴다. 쾨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높은 하늘, 먼 산을 파랗다고 보는 것처럼 파란 면은 우리 눈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어떤 호감 가는 대상을 우리가 기꺼이 좇는 것처럼 우리는 파란색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이 색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희망이 없는 공동체는 회색으로 덮여 있다. 먼 것이 없다. 


희망의 정신을 지닌 우리는 '지나간 것' 안에서도 '앞으로 도래할 것'을 발견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자 다른 것인 '앞으로 도래할 것'은 '지나간 것'이 꾸는 낮의 꿈이다. 희망의 정신 없이는 동일성 안에 갇히게 된다. 희망의 정신은 '지나간 것'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의 흔적을 좇아 나아간다. 그렇게 과거는 구원을 암시하는 은밀한 지표를 지니고 있다. 125-126


'아직-아:닌' 전시는 희망을 다루는 만남이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의 부제, 아니 원제목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밤꿈이 아니라 낮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의 <<불안사회>> 역시 희망을 다루고 블로흐를 언급하고 있다. 오프닝때 전시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낭독한 대목이기도 하다. 


Bowl시리즈는 공동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모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붙이고 긁고 오리고 금가게 하고 다른 것들로 채우기도 하고, 선물present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고 싶은 텍스트들도 판박이처럼 붙어있기도 한데, 훗날 알게될 스토리이기도 하다.


Blue 시리즈는 옮긴 대목을 다시 보며 환기시켜도 좋을 듯하다.




볕뉘


소소영화관에 전시중인데 상주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 간간히 들르긴 하지만, 위의 스토리를 갖고 보시면 더 좋을 듯하다. 소소영화관에서 추천중인 영화 <쇼잉업>을 보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이 역시 작가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싶다. 아마 4월 중순까지 편하게 오셔서 둘러보시고, 한 켠에 마련한 책장과 책들도 전시를 위해 준비한 소품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