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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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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것, 뼈와 살을 갖는 것. 자기중심성. 모두는 특유하다. 고대인,현대인, 자유인(현대인으로서). 정치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인간적 자유주의.


몸을 낮춘다. 아니 도려내고 있다. 그간 자유로움의 끝을 보아서 외식을 줄이면서 좋아하는 것과 잠시 결별중이다. 아니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 발아현미에 건나물을 넣어 밥을 짓고, 강황을 차처럼 한두잔 마셔준다. 그렇게 한 지 한달남짓. 몸의 무게도 내려가기를 멈추고 있다. 


어젠, 이 책을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다. 막 1부 인간에 대해 읽고 잠을 청한다. 내란수괴의 마지막 확인몸부림까지 읽다. 잘했다. 그렇게 스스로 못됨을 확인해주는 것도 의미있겠다 싶다.


 

1. 

 

청년은 도처에서 세계를 잘못 생각하고, 세계를 더 낫게 만들려고 하며, 자신의 이상에 따라 세계를 설계하려고 한다. 이와 달리 어른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린다. 이 사실이 청년과 어른의 차이점이다. 어른에게는, 세계를 자신의 이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에 따라 다루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확고하다. 자신을 정신으로만 알고 있고, 자신의 모든 가치를 정신임에 두고 있는 한(무가치한 것을 위해, 가장 하찮은 명예를 위해, 자신의 생명, 그 육체가 깃든 생명을 내팽개치는 것은 청년에게는 쉬운 일이다.), 또한 오직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한, 일단 어떤 행동 영역을 찾아내었다면, 청년은 이념을 실현할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러므로 그동안에 그는 오직 이상, 곧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이나 생각만을 가지고 있다. 뼈와 살을 갖춘 자신을 사랑하게 될 때에만,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즐길 때에만하지만 그러한 것을 확실히 찾아내는 것은 성숙한 나이, 곧 어른의 경우에서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 어떤 자기만의 (persönlich) 또는 자기중심적 관심을 갖는다. 23

 

 

2.

 

어린아이에게는, 바로 동물처럼,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이란 표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미 '좋고 나쁜, 정당하고 부당한' 것과 같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정도는 발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도의 반성 혹은 사리 판단 능력(종교의 고유한 관점)에 의해서만 자연스럽지 않은(다시 말해, 지금 막 생각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경외(Ehrfurcht), '신성한 두려움'이 자연적 두려움(Furcht)을 대신할 수 있다.  이러한 신성한 두려움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여긴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다음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는 태도는 그 낯선 힘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낯선 힘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78] 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 굴복하고, 항복하며, 자신을 속박하도록 하는 것이다(헌신, 겸손, 굴종, 복종 등등). 여기에 '기독교적 미덕'이라는 모든 허깨비의 무리가 유령으로 돌아다닌다. 어떤 존경 혹은 경외를 느끼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하다. 또한 당신 자신에게 말하길, 당신은 그것을 살짝 건드리며'신성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신성하지 못한 것(교수대, 범죄 등등)에게서도 이러한 기미를 띠게 한다. 당신은 신성한 것을 만지는 것이 무섭다. 신성한 것에는 어떤 두렵고 낯선 것, 다시 말해 어떤 친숙하지 않은 것 혹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있다.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참으로 113


3.

 

'사랑하는 보호자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의 원리도 태생의 원리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함이라든가 중용의 원리이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태생의 원리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노동의 원리, 다시 말해 이자를 낳는 소유의 원리가 그것이다. 여기서 소유란 고정된 것, 주어진 것, 상속된 것(태생)을 말하는바, 그로 인하여 이자란 수고(노동)이며, 따라서 노동하는 자본(arbeitendes Kapital)이다. 어떤 과도함도, 어떤 극단주의자도, 어떠한 급진주의도 허용되지 않는구나! 틀림없이 태생의 권리는 인정되지만, 오직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소유만이 허용된다. 확실히 노동이 인정되긴 하나,[125] 거의 또는 전혀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과 고분고분한 노동자의 노동만이 인정될 뿐이다.한 시대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것으로부터 어떤 사람은 손해를 입는 데 반해, 어떤 사람은 항시 이득을 본다. 중세에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모든 권력을, 혹은 최고의 주권을 가져야만 한다는 오류가 기독교인 전체에 해당된 오류였고, 성직자는 평신도 못지않게 이 '진리'를 믿었으며, 양자는 모두가 동일한 오류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오류를 통해서 성직자는 권력이라는 이득을 보았던 반면, 바로 그러한 오류 때문에 평신도는 복종이라는 손해를 입었다. 그러나 '손해를 보아야 지혜롭게 된다'라는 속담처럼, 그렇게 평신도는 마침내 슬기로워졌고, 이제는 더 이상 중세의 '진리'를 믿지 않았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도 존재한다. 부르주아와 노동자는 돈의 '진리'를 믿는다. 돈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소유한 부르주아 못지않게 돈의 진리를 믿는데, 이러한 것은 과거에 평신도와 성직자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돈이 세상을 지배한다.'가 부르주아 시대의 지배적 분위기이다. 179

 

4.


그러므로 인간적 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노동을 원한다. 자 이제, 우리도 마찬가지로 노동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최대한 노동을 원한다. 우리는 여가를 얻기 위해서 노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 그 자체에서 모든 만족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원한다. 우리는 노동을 원한다. 왜냐하면 노동이 우리의 자기발전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노동도 또한 노동의 목적에 맞게 조정되어야만 하는구나! 인간은 인간다운 노동, 자기 의식적 노동, 노동의 목적을 위해 '자기중심적' 의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만을 갖는, 그리고 인간의 자기표명 (Selbstoffenbarung)인 노동에 의해서만 존경받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laboro, ergo sum : '나는 노동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해야만 한다. [145] 인간적 자유주의자는 모든 물질에 작동하는 정신의 노동을, 어떤 것도 가만히 두거나 기존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 그런 정신의 노동을, 아무것에도 안심하지 않는 정신의 노동을, 모든 것을 제거하고, 획득한 모든 결과물을 새롭게 비판하는 정신의 노동.206

 

5.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완전히 다른 인간, 더 가치 있고, 더 높고, 더 위대한 인간, 다른 인간보다 그 이상인 인간을 드러낸다(offenbarest)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그대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을 완수해냈으며,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그대가 이루어냈다고 하는 점을 확언하고자 한다. 그대의 위대함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대가 다른 인간들(그 '대중들')보다 그 이상이라는 것. 보통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보다 그 이상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 정확히 인간을 넘어선 그대의 고귀함이라고 하는 점에 있다. [147] 그대가 인간이란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독특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다. 그대는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한 인간인 그대가 그 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 인간들 또한 결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 그대는 독특한 인간으로서만 그 일을 행했고 그런 점에서 그대는 유일한 것이다.인간이란 것이 그대의 위대함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가 그대의 위대함을 창조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이며, 다른인간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세상사람들은 한 사람은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일 수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한 사람은 인간보다 더 못한 존재일 수 없구나!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한 사람이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믿는다. 내가 항상 어떤 사람으로 남아 있는 한, 209

 

6.

 

더 제한된 공동체 속에서 프랑스 사람은 여전히 독일 사람을 적대했으며, 여전히 기독교인은 이슬람교인을 적대하였다. 등등. 그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 인간(der Mensch)이 그 인간들(die Menschen)에 적대하고, 또는 그 인간들이란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인간은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에 적대하고 있다.이제 "신이 인간이 되었다."라는 문장에 다음 문장이 이어진다. "인간이 내가 되었다." 이 문장은 인간다운 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을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찾는 한, 나는 나 자신을 결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내가 되길 열망하고 나 속에서 뼈와 살을 갖추길 갈망한다는 일이 아주 분명하다. 어찌되었건 나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없으면 인간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가장 신령스러운 영역에서 나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내가 추적하는 것이 인간인지 또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인지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정신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게!인간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작동한다. 만약 그대가 한 가지 점에서 특별한 사람이 되거나 특별한 것을 갖고 싶다면, 만약 그대가 그대를 위해 남보다 뛰어난 특질이라도 지키길 원한다면, 그리고 만약 그대가 '보편적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권리라도 요구한다면, 그대는 자기중심적 사람이다. 217


볕뉘


책은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키워드를 중심으로 흐름을 쫓아가면 잡힌다. 인류는 어쩌면 이런 질문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 아직 아닌 유토피아를 말하려면, 아니 우리의 일상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한다면 이 질문은 필수다. 이 양반은  자본주의, 봉건주의 중세, 고대를 아우르면서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구조적인 문제짜지 잘 다루고 있다.  몇 번 거듭 보시고 두꺼운 책을 읽어내시면 지금 시류와 맞춰 무척 아름답고 무한한 것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당신 독서이력에 새로운 방점을 찍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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