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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글다방
  • 소립자
  • 미셸 우엘벡
  • 14,220원 (10%790)
  • 2009-11-30
  • : 3,417

한마디로 이 책은 충격이었다. 읽기가 매우 불편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느꼈던 충격을 고스란히 십 년만에 다시 느끼게 된 셈인데, 흘러간 세월만큼 충격의 강도도 열 배, 아니 백 배쯤 더 컸다.​

솔직히 이야기 해서, 이 책은 매우 야하고 폭력적이며 원색적인 문장들이 가득하다.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일어났던 물질주의 사상과 히피 문화의 실체가 성과 폭력, 변태적 욕구의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간중간 읽기를 그만두고 싶어졌던 적이 스무 번은 훨씬 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후반부로 향해갈수록 이 책이 우리에게 반문하는 메세지가 또렷해지면서 서사의 무게감이 서술상의 표현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읽기를 그만 둘 수 없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책은 브뤼노와 미셸이라는 이복형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1960년대 히피와 물질주의 문화의 범람 한 가운데서 태어나 제각기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동일한 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들의 성향과 인생은 갈림길에서 길이 나뉘듯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형인 브뤼노는 성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을 키워가는 가운데 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립된 채 살아간다. 미셸은 반대로 성적 욕망이나 애정에 대한 갈망이나, 여타의 감정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는 분자에 대한 연구만이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교체시키며, 그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거나 무언가를 찾아 나서거나 혹은 무언가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둘을 따라가다보면 미로 속을 헤메이다 거대한 벽을 마주하고 서 있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찾아 온다.

과연, 우리는, 우리 개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유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미셸은 분자와 원자 등과 관련된 생화학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이러한 문제의식이 그의 소립자에 대한 연구와 생각 등으로 빗대어 표현되고 있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이제 두 개의 가설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의 운동을 결정하는 감추어진 속성들이 국소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소립자들은 서로 얼마만큼 떨어져 있든 간에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또 하나의 가설은, 소립자들이 관측 문제와 무관하게 내재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재적인 속성을 지닌 소립자라는 개념을 포기하면, 우리는 깊디깊은 존재론적 공허 앞에 놓이게 된다."

중세시대부터 사회와 경제, 정치를 지탱해 오던 신(神) 중심적 가치체제가 붕괴하자 인간과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으로서 의미를 갖던 인간은 이제 세계 질서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존재 자체가 전우주적 생태계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신이 약속한 구원과 영생이 퇴색하자, 인간은 생물종으로서 죽음과 직면해야 했다. 아무리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쇠와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번영과 풍요를 약속해준 물질론적 가치체제는 그 이면에 존재의 유한함이라는 무서운 진실을 품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인류는 죽음에 대한 무력감과 공포를 외면하기 위해 진보에 더욱 매달렸던 것 같다. 끊이없이 자신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흐름은 각자의 사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우고자 했던 것이다. 1970년대 히피족, 1990년대 X 세대, 그리고 약 십년 후 또 다른 용어로 정의될 2000년대 초반의 청년들. 그들과 우리는 이전 세대보다 진보했다고, 이전 세대와는 다른 무언가를 창조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우리 개개인은 고유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대사회는 개성을 그 어느것보다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이러한 우리의 자신만만함이 오히려 우리 사고의 자기중심적 한계를 반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뤼노를 한낱 개인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그의 기관들이 썩어 가는 것은 그의 몫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쇠퇴를 겪고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관이나 그의 의식과 욕망을 구조화하는 역장은 그의 세대 전체에 속한다. 어떤 실험을 위해 장비를 설치하고,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관측 가능한 물리량을 서택하면, 하나의 원자 시스템에 일정한 운동-입자적인 운동이든 파동적인 운동이든-을 부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브뤼노는 한낱 개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역사적 흐름의 수동적인 요소일 뿐이다. 동기, 욕망, 가치관 등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그는 동시대 인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가치판단을 하고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사고와 움직임은 입자운동 내지는 파동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거대한 시대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도시의 물질만능주의가 싫어 귀농을 선택하고, 자연 보호의 일환으로 채식주의를 선언하며 스스로의 자율적인 선택과 실천에 우쭐해 하지만, 사실은 귀촌이든 채식이든 또 하나의 시대적 조류일 뿐이다.

뻔하지 않으려는 뻔함, 그것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굴레이다.


결국 브뤼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미셸은 자가복제를 통해 성적 수단 없이도 종족 번식이 가능한 신(新) 인류를 창조한다. 브뤼노가 온 생애를 통해 대표했던 물질주의 세대가 저물고, 물질적 유한함을 초월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러한 결말을 통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 것이 과연 욕망과 유한성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진보였을까?


나는 감히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브뤼노와 미셸 모두, 생의 마지막에 그저 단순한 성적 충동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브뤼노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육체와 병적인 욕망을 모두 껴안아 주는 여자를 만나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미셸은 어린 시절 친구 아나벨을 다시 만나, 비록 사랑을 느끼지는 못 했지만, 그녀가 전 인생을 걸고 찾아 헤매었던 사랑이라는 것이 실체에 한 걸음 다가 서게 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모두 비극으로 끝나 버린다.

얼핏보면 작가가 현대사회의 사랑의 환상을 조롱하고, 새로운 인류상을 제시함으로써 한 단계 진보한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묘미는 바로 그 트릭을 한 꺼풀 벗겨내고 그 속내를 찾아내는데에 있다.

작가는 우리가 진보해야만 하는 존재인지, 고유한 개별적 존재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다시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가져다 주는 융합적이고 퇴행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위의 한 문장에 모두 집약되어 있다.

우리는 비록 거대한 입자 파동 속의 티끌만한 소립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 앞에서 진보는 커녕 더욱 유치해지고 비이성적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사랑과 가정과 번식이라는 수천 년에 걸친 인류 본래의 테제가 해체된 신인류는 행복할까? 작가가 그린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시대는 작가가 우려하는 궁극의 디스토피아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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