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옆구리에 끼고 통학길을 오가며, 내가 꽤나 심오한 인생의 수수께끼 앞에 서 있다고 느꼈다.
"내가 계속해서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6.25 전쟁 직후 할머니가 세례를 받은 이후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작은 할아버지들을 시작으로 우리 집 식구가 된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나 또한 태어나자 마자 유아 세례를 받고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성실한 신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19살 겨울방학에 네팔 오지의 고아원으로 봉사활동을 떠난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내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첫 번 째 이유는 가난과 질병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 받고 너무도 열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고아원 아이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서, 왜 어떤 아이들은 단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팔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등지의 극지에서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운명은 대체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이러한 삶의 조건을 결정 짓는 신의 섭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한 번 들기 시작한 의문은 하나가 채 해결되기도 전에 연이어 내 머리와 마음을 강타했다.
두 번 째 이유는 네팔 종교 문화의 너무도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다.
봉사 일정 끄트머리에 견학 차 힌두교 사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어떤 가족이 사원 앞 강가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는데 막 시신을 화장한 듯 했다. 주황빛 두건을 머리까지 둘러 쓴 노파가 한 손으로는 손녀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잿가루를 강 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 옆을 지나던 중 다 타지 못한 시신의 발바닥을 보았다. 그 순간 정수리를 벼락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더 충격적인 것은 화장터 바로 맞은 편 강가에서는 사람들이 태연하게 빨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국의 낯선 종교가 내뿜는 생생한 이미지와 어지러운 향내 사이에서 나는 내가 믿던 종교의 바깥 세상을, 커다랗고 무지막지한 또 다른 종교가 버티고 서 있는 세상을 엿보았다.
그 이후로 부모님을 따라 성당 미사에 참석하면서도 내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딴 생각들이 자라났다.
"신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믿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라면, 우리는 왜 여러가지 종교로 나뉘어서 서로 합쳐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내버려 두는 신의 뜻은 무엇일까?" 등등...
바쁘고 고된 일상에 질문들은 어느새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에 묻혀 버렸다.
하지만 근래에 일어나는 각 지역 종교 분쟁들과 그로 인한 유혈 사태들을 바라보며 다시 슬금슬금 여러가지 생각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 팀장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바로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다.
줄거리를 간추려 보자면, 프랑스 대선에서 이슬람 정권이 승리하면서 교육 부문을 중심으로 이슬람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 교수와 지식인 세계가 직면한 갈등과 선택의 문제를 그린 이야기이다.
최근 테러를 차치하고라도도 유럽, 특히 프랑스 내에서 무슬림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적 갈등이 꽤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선택의 기로에 선 교수가 결국 이슬람 체제에 복종하게 되는 이유가 집약된 뒷부분이다.
대선 이후 프랑스 지성인 양성소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소르본 대학에 막강한 중동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학교 측은 교수들에게 선택을 종용한다. 교수들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교수직을 유지하든지, 종교 혹은 정치적 신념을 고수하는 대신 퇴직을 해야 하는(대신 평생 동안 여유있게 지낼 수 있는 연금과 퇴직금은 지급된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주인공 역시 선택지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교수 중 한명이다. 그는 위스망스라는 프랑스 소설가를 연구하는 꽤 명망 높은 중견 교수인데, 고립된 독신 생활에서 오는 고독감과 권태에 허우적 대는 인물이다.
대선 직후 교수는 혼란스러운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로 피신한다. 선택을 유보하는 대신 그는 말년에 카톨릭에 귀의했던 위스망스의 발자취를 좇는다. 아마 그도도 자신의 뿌리와 자기 확신을 종교로부터, 그가 나고 자라온 프랑스의 근간이 되었던 카톨릭으로부터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가 도피 여행의 끝에 발견한 것은 위스망스도 자기도 결국 종교나 정치, 고통과 구원이라는 거대한 담론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단지 따뜻한 가정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느끼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던 것이다.
"위스망스의 유일한 진짜 주제는 소시민적 행복이었다. 상류층의 행복이 아닌, 독신자에게는 절망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한 소시민적 행복.
(...) 그의 눈에는 예술가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적당한' 와인을 곁들여 고추냉이 소스에 포토푀를 찍어 먹는 즐거운 식사 시간이야 말로 진짜 행복을 대변하는 풍경이었다.
그러고, 창밖으로는 한겨울 돌풍이 생 쉴피스 성당탑을 때리는 가운데,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자두주 한 잔을 걸치면 그만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에게 학교는 즉각 답을 줄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던 와중에 그는 학교에 남기로 선택한 동료 교수를 만난다. 동료 교수는 이슬람의 중매문화를 이용해 어리고 아리따운 새 부인을 막 맞이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자신이 결국 학교에 남을 것임을 확신한다.
결국 독신의 외로운 교수가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교수직에 머물기로 선택한 이유는 직업적 책임감도, 학문적 열정도, 종교적 선택도 아니었다. 그를 복종하게 한 것은 가정의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소시민적 소망, 단지 그뿐이었다.
작품 속에는 주인공을 둘러 싼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이해관계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자신의 소시민적 행복이 처한 위협감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날 일어나는 종교 갈등은 정치, 경제 문제와 첨예하게 얽혀 해결이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자기들끼리는 신전(神戰) 혹은 정의추구라고 외치는 구호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후에 버티고 서 있는 자본과 권력의 논리가 너무도 적나라하기 때문일까?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가 되고, 신에게 선택 받은 자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터, 대체 이 전쟁을 기획한 신은 누구인가?
책장을 덮으며 잠시 새로운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왜 나는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운명에 처할 아이들을 세상에 내 보낸 신에게 분개했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신의 전사들은 대체 어떠한 근거로 신이 자신들에게 그러한 권리를 부여했다고 자신하는가?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신이 인간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확신하는가?
전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사자, 코끼리, 개미, 나무와 같이 생태계를 구성하는 작은 구성원일 뿐이다.
신에게 우리의 고통과 번뇌는 사자와 사슴이 벌이는 생존 경쟁과 하등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다른 종에게는 없는 특별한 이성과 권한을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반대 편의 적들에게 우리의 신에게 복종하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그러면 구원과 영광이 따를 것이라면서.
그러나 정작 세계가 펼치고 있는 이 지난한 싸움의 실체는,
신을 우리의 소시민적 행복을 위해 복종시키려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