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완전히 다르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세계로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사고의 문법이 완전히 다른 미지의 공간에 던져졌다가 귀환한 느낌이랄까?
쿠바의 소설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작품인 이 소설은 세르반도 수사가 종교적, 정치적 탄압을 피해 멕시코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오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세르반도 수사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처하게 되는 당혹스러운 상황과 사건들, 그리고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양한 각도로 - 실제로 시점이 1인칭, 2인칭, 3인칭으로 계속해서 바뀐다 - 포착하고 표현한다.
글을 읽다보면 내가 세르반도의 뒤를 밟아 그의 행적을 쫓는 느낌이 들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의 옆에서 추격을 피해 함께 도망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소설속 관점과 나의 관점이 시시각각 변하는만큼 주변 세계도 정신차릴 새 없이 널뛴다. 제목 그대로 '현란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실 작품 속 세계는 현란한만큼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과장되고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는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분은 간단하게 생략되고 비약한다. 특히 수사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를 묘사하는 부분은 현란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처음에는 소설의 이러한 표현들이 낯설고 버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의 흐름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였던 것 같다. 객관과 주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세르반도 수사가 보고 느끼는 세계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때문에 조국에서 배척 당해야 했던 작가의 경험이 세르반도 수사의 끊임없는 탈옥과 도주의 이야기에 녹아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 사회적 배경에 따른 작품 이해보다는 한 사람이 지각하는 세계가 어디까지 늘어나고 변형될 수 있는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서 이 소설을 읽었다.
"나는 오전 6시의 나무가 정오의 나무 그리고 날이 저물 때 그 무리가 우리를 위로해주는 나무와 같지 않음을 끊임없이 발견한다. 밤에 부는 바람이 아침에 부는 바람과 같을까? 해 질 녘의 수영객이 케이크를 자르듯 물살을 헤쳐 나가는 바다가 정오의 바다와 같을까? 시간이 나무나 경치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데, 가장 민감한 피조물인 우리가 그러한 표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바다처럼 잔인하다가도 부드러워지고, 이기적이면서 관용적이고, 열정적이면서 또한 사색적이고, 말수가 적다가도 많아지고, 공포스럽기도 하다가 숭고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현실이 아닌 모든 현실 또는 적어도 몇 가지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p.15-16)
서문 격인 책의 첫 장에 나오는 위 부분을 부표 삼아 작가가 펼쳐보이는 현란한 세상을 가까스로, 그러나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 전과 후의 나는 어디인지 조금쯤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생애,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문학 사조 프레임으로 작품을 해석하기에 앞서 하나의 만화경처럼 신비하게 펼쳐지는 소설 속 세상을 여행하듯이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 국내 초역 작품인데, 앞으로 더욱 다양한 언어권의 소설들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낯설다고 느꼈던만큼 내가 기존의 영미문학 혹은 유럽문학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