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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말주의자 고희망
  • 김지숙
  • 11,700원 (10%650)
  • 2022-08-08
  • : 199


나는, 청소년 소설 읽는 중년으로, 세상의 모든 중년이 반드시 우리나라 청소년 소설을 읽어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건, 지구의 미래가 우리 중년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중년이 희망과 추억을 잃지 말아야 우리 사회와 미래가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ㅎㅎㅎ


*


김지숙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잊고 지낸 청소년 시절이 절로 떠오른다. 청소년 시절의 나는 세상에 무덤덤했고, 나 자신밖에 몰랐고, 혼자 놀기에 바빴다. 친구 사귀는 문제는 늘 어려웠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멀어진 친구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옹졸함 때문이었는데, 친구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 어느날 나는 중학교 시절의 그 친구를 못 잊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인터넷에서 친구의 흔적을 이리저리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러나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끝내 알 수 없었다. 혹시 뒤늦게 친구의 연락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아마 친구에게 연락하지 못할 것이다. 그 시절은 이제 지나가 버린 것이고, 되찾을 수 없다. 친구가 현재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짐작이 어렵다는 점도 연락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친구 역시 나를 예전처럼 반길지 의문이다. 현재의 나는 친구의 삶과 가치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도 크다. 그런데도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돌이키는 일은 괜히 벅차오르는 일이다. 안녕 미소여, 안녕 조소여, 추억이여. 종말이 오면, 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곳으로 우리 모두 사라질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런 소멸을 향해 가는 긴 여행에 불과하니 말이다. 청소년 시절에 누가 과연 그런 종말이나 소멸을 생각한단 말인가. 놀기 바쁘지. 아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언제나 주변에 예민한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대체로 무관심했으나, 소외나 상처를 겪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그러니 청소년이라는 시기에 우울한 시선으로 죽음을 사색하는 힘든 친구도 분명 있었겠지. 각자 결혼한 뒤에 서로 막연히 지내던 여동생 둘과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문득 동생들과 동네에서 커피나 술을 마시며 대화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절에도 각자의 일상을 살았을 뿐. 그런데 동생들이 나를 탓하는 말을 했다. 엄마가 오빠만 엄청나게 챙겼잖아. 뭐? 정말? 나는 기억이 없는데. 오빠는 늘 무심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과거의 가족사를 언급하는데, 서로의 기억과 해석이 달랐지만, 내가 무척 무심한 오빠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시절을 보내버린 나로선 <종말주의자 고희망>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종말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우울한 고민에 빠져 지낸 기억들이 있었다. 좋아하던 여자아이와 우연히 같이 길을 걷게 된 순간 어떤 망설임이라든지. 같은 방 쓰던 사촌 형과 수학 문제를 두고 갑론을박하며 다툰 일. 교회 집사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일. 종교 때문에 가족과 갈등을 일으켜 네 시간 가출(?)을 감행한 일. 교회에 나가던 이유가, 결국 그림 잘 그리던 여학생 S 때문임을 스스로 깨친 순간. (S가 멀리 이사 간 뒤에 깨우친 것이지만) S를 교회에서 볼 수 없게 되자 우울증에 빠졌던 일. 그 뒤에 집사의 훈육을 증오하며 교회를 떠난 일. 가족과 종교 갈등은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우울해서 여동생들에게 만화책이나 대여해오라고 심부름시킨 일. 막내는 이현세 만화를 좋아했는데 나는 고행석 만화만 고집해서 다툰 일. 심부름은 자기가 하는데 만화는 오빠가 좋아하는 것만 빌려오라니, 울컥! (막내의 고백)


<종말주의자 고희망>을 읽다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추억에 하나씩 빠져들었다.

그러니, 모든 중년이 꼭 읽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이 닥친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가족과 친구들이 눈앞에서 흐려지고 소멸한다. 이런 종말 현상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왜 자신들만 남게 되었는지 고민한다. 혹시 모든 게 자신들의 잘못이 아닐까. 가족과 다툰 일 때문에? 세상을 저주했기 때문에? (동생의 죽음을 내가 초래했기에?)


그런데 이것은 주인공 고희망이 어느 사이트에 연재하는 소설의 내용이다. 소설 속에 소설이 나오는 셈이다. 고희망의 현실과 고희망의 소설이 번갈아 독자 앞에 등장한다. 고희망의 현실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고, 소설 속 이야기가 고희망의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남자아이의 고백에 당황하는 모습, 멀어지는 마음과 질투 비슷한 것, 친구 지수와 나누는 유머와 우정, 갈등 등.


김지숙 작가는 우리에게 (변함없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번 소설에서는 ‘고요한 희망’까지 선사한다. 세상을 향한 청소년들의 시선과 고민을 차분하게 다룬다. 감정의 결이 섬세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상징하는 듯한 삼촌과 할머니의 상반된 입장도 편향 없이 균형있게 다룬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를 배려할 때, 비로소 온전한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작가의 메시지인 듯하다.


*


책을 사들고

<저자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코로나 시대이고 하여,

내가 직접 책의 속지에 <독자 친필 사인>을 했다.


- 김지숙 작가, 수고했어요! 2022. 9.29 ... 독자 시간의 검은 등 (독자 친필 사인)


(이제 이 책은 독자 친필 사인을 지닌 매우 값진(?) 책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흐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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