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서에 필요한 자질은 느긋함, 편한 의상,
문장을 음미하는 눈,
동심, 연애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기억,
진지함, 위트, 유머, 공감,
호기심, 상상력, 시공간 이동술,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내 멋대로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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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에머슨 명언 500>,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문장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위에 쓴 것과 같은 글을 흉내 내기 기법으로 한 번 써보게 된다. 나름 재미있다. 써놓고 읽어보면 너무 많이 나열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세에 명언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될 계획은 내게 아직 없다. 그래서 그럭저럭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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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점에 가니 카르스텐 두세의 <명상살인 2>가 진열되어 있다. 1편을 흥미롭게 읽은 탓에 서슴없이 책을 집어 든다. 보통 진열된 여러 권 책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남들 손이 안 탄 책을 고르려고 이리저리 살핀다. 어차피 나중에는 때가 묻고 종이도 접히고 표지에 흠집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첫 대면에서는 가장 산뜻한 걸 골라내기 위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하물며 즐거운 미소의 저녁 시간을 선사해주는 '명상살인'인데 더욱 정성껏 살펴야 할 터.
서점에 가기 전에 인터넷 알라딘에 접속해서 <새로 나온 책들>의 소개 글을 차근차근 응시한다. (자세히 읽진 않고 그저 잠시 응시한다. 하하) 이번에 끌린 책은 <지루함의 심리학 - 지루함이 주는 놀라운 삶의 변화>이었는데, 막상 서점에 가보니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열대 책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우연히 예술적인 표지를 지닌 한 권에 눈길이 간다. 제목이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이다. 책을 펼치니 서양미술 작품 1000개가 깔끔한 컬러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마다 간략한 해설이 적혀 있다. 내가 아는 미술작품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작품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모두 선명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 책도 사기로 한다.
세 번째로 고른 책은 과학 코너에 있는 책이다.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흥미를 끌지만 바닷속에서 물고기와 행진하는 인어가 그려진 표지도 매력적이다. 뒤표지 소개 글을 읽는다. "사랑과 혼돈, 과학적 집착에 관한 룰루 밀러의 경이롭고도 충격적인 데뷔작!" 정말, 정말일까? "이 책은 완벽하다. 그냥 완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정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사소하면서 거대하고, 별나면서도 심오하다." 너무 심하게 강력한 추천이네. "눈을 뗄 수 없다. 놀랍다. 심지어 충격적이다! 유명한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 이야기로 독자를 매혹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아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서며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당신의 가슴을 사로잡고, 당신의 상상력을 장악하고, 당신의 예상을 박살 내고,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결국, 이 책도 구매하기로 마음먹는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늦었기에, 오히려 느긋해진다.
그런데 서점의 계산대에 줄이 평소보다 길다. 코로나 5만 명 시기라서 주말 독서 삼매경에 빠지려는 인구가 늘어난 걸까? 여하튼, 난 긴 줄의 맨 뒤에 선다.
내 앞에 키가 크고 젊고 앳되고 순진한 여대생 정도 된 여자애가 한 명 서 있다. 여자애가 흘끔 나를 자꾸 돌아다 본다. 나는 내가 고른 책 세 권을 왼손에 받쳐 든 채, 중년 아재답게, 중년다운 표정으로, 중년의 눈길로 먼 곳을 그윽이 바라본다.
톡톡, 여자애가 뭔가 결심한 듯, 내 쪽으로 몸을 확연히 돌리더니, 내가 든 책의 모서리를 살짝 건들며 말을 건넨다.
- 저기요, 책만 사려면 저쪽이 빨라요. 저기 저쪽이요. 바로 결제.
나는 여자애가 가리킨 곳을 본다. 거기에는 <도서전용 카드결제-바로 결제>라고 적힌 무인계산대 기계가 두 대 설치되어 있다.
여자애는 분명히 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만 골라든 중년 아재인 내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안타까운 것 같다. 친절히 바로 결제를 알려주다니!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하필 나라는 인간이, 카드를 안 쓴다는 거다.
(삼 년 전부터는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카드를 지니고 다니면 충동적인 (도서) 구매를 심하게 하거나 충동적인 음주를 하거나 하기에, 우리 집의 의사결정권자가 카드를 모두 잘라 버리라 신혼 때에 지시했던 것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우리 집 의사결정권자는 여러 개의 내 명의로 된 카드를 들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현금과 교통카드만 지참하고 다닌다. 코로나 백신 접종 증명도 휴대전화가 없는 탓에 종이 증명서를 발급받아 다니는 디지털 원시인이 바로 나다.
하필 나 같은 아날로그 아재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나는 서점에서 만난 친절한 여자애에게 이렇게 말한다.
- 아, 나는 카드는 없고, 현금만 있고, 시간은 많아요…
여자애는 무안함과 황당함을 느낀 표정으로, 아아, 하며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휙, 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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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서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기적이 아니고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것 같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제대로 고맙다고 말을 못 했는데,
지금이라도, 학생, 신경써주어 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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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 읽는 법
- 먼저 그림을 들여다보고 이 그림의 제목이 뭘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제목과 설명을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읽는 법
-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살던 시절, 그 시대의 종교와 세계관의 분위기를 감안하고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명상살인 2> 읽는 법
- 1편을 먼저 읽은 뒤에 읽기를 권장한다. 명상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달게 된다. 살인할 때도 평온해진다.
물론 나쁜 놈 죽이기다.
유머는 보너스!
(물론 1편 얘기고, 2편은 아직 읽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