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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조카들이 자지 않는다. 자다 먹다 싸다 하는 이놈들은, 제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누이의 품을 떠나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서 자란다. 늦은 낮잠을 자다 열시에나 깬 둘째조카는 환갑을 넘기신 내 아버지를 타고 놀며 새벽까지 깔깔거린다. 자격증을 준비중인 서생인 나는 인간의 권리에 대해 논하는 공부를 하고 있으나, 제 아버지의 생의 어려움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 쓰일데 없는 지식이 많은 듯 하여 나는 나와 [남한산성]의 간언하던 자들을 겹쳐 생각한다. 그들이 인조를 보좌하지 못하듯이, 나역시 나의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다.

 

말의 홍수 속에서 전투를 치르며 살아온, 지금도 '사느라' 그 자신이 혐오하는 글을 쓰는 김훈. 그는 글쟁이들을 잘 알아서인지 그들을 혐오한다. [칼의 노래]에서도 느꼈듯이, 말에 휩싸여 싸우다 밀고 밀려본 그의 이력은 그의 [文]에 대한 경멸이 괜한 말들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칼의 노래]가 그의 삶에서의 싸움이 배여있는 듯 읽혔다면, 이번 글은 그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가벼운 소풍처럼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남한산성에 주인공이 없다는 느낌과도 같다. 자연은 그 자체의 법칙으로 굴러가고 있는데, 그것을 [文]으로 막아보려는 인간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것인지. 청은 힘이고, 결국 세상은 힘의 작용으로 움직이고 꿈틀댄다.  [전쟁과 평화]의 인간군상들이 그러하듯, 지휘부는 지휘하지 못하고 정작 전쟁은 다른 힘에 의해 결정된다.

 

[남한산성]에서는 똥이 삭아 거름이 되듯, 사람은 죽어 썩어들어간다. [文]의 묘사가 어이없고 의미없는데 반해, 똥이 썩고 시체가 썩어가는 묘사는 머릿속에 또렷이 떠올리게 적어내려간다. 두 존재에 차이는 없다. 김훈은 인조 만큼이나 위악적이다.

 

그럼에도 김훈의 글은 여전히 생과, [文]에 오염되지 않은 노동하는 삶에 대한 존중속에 있다. 서생인 나역시 그러한 삶을 존중하여 그들의 삶 터로 들어가본 적이 있으나,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날생]의 삶을 좋아하고 가슴에 품을 일이지, 나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삶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길임을 인정할수 밖에 없다. 자신의 기가 아닌것이 객기라면, 객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김훈도 역시 글을 계속 쓴다. 그역시 날생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날생을 존중하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나역시 그러하다.

 

늙은이들을 사다리 삼아 젊은이들이 자라나는 것도 자연의 이치인가. 조카들이 잠들었는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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