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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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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규항에서 장정일까지는 솔직히 읽히는 대로 읽고, 쓰고 싶은 대로 썼다. 그러나 막상 [강의]에 달하자 손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진다. 제대로 읽기는 한 것일까. 평은 무슨? 신영복 선생님은, 여전히 무겁다. 게다가 20년. 20살때와는 또다르게, 짧게나마 징역을 겪어본 나에게 20년 징역을 살아낸 사람의 무게는 쉽지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강의]는 앞서의 책들과는 전혀 다른것이, 이 책이 분석하고 소개하고 있는 원전들은 내가 전혀 읽을수가 없는 책들이다. 천자문도 못읽는데 [논어]는 무슨? 하기에, 결국 내가 토를 달것은 책 자체에는 접근도 못한 채 선생께서 잡아놓은 해석의 '관점'이 마음에 드네 안드네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사서 읽고는, 여태껏 이 책에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오늘 좀 풀어놔 보자 싶어서 막상 쓰려니, 또다시 겁이 나는 것이다.

 

2.

 

사실 [강의]는 요약본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이 [나무야 나무야]이다. [나무야]는 내가 전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거의 권하였던 책이었는데, 성공한 예가 없다. (마찬가지로 와호장용 역시 거의 모두에게 권하였으나 오직 한명만이 호응하였을 뿐이다.) 나는 [나무야]를 "검열을 의식한 글쓰기가 오래되어 이제는 스스로 은유적 글쓰기를 하게된" 한 지식인의 혁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읽었다.

 

[강의]역시 나는 그런 관점으로 읽었다. 선생께서 고전에대한 강의로서도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는 글을 내셨으나, (사실 이책이 아니었던들 중국고전을 망라하는 원문의 주요부분을 어찌 접할 기회나 있었겠는가) 결국 선생은 이를 도구로 삼으셨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선생께서는 '강의를 마치며'라는 글을 통해 만일 고전강의를 통해 성찰의 역사인식을 얻었다면 "마치 강을 건넌 사람이 배를 버리듯 고전의 모든 언술을 버려도 상관없다"고 언급하고 계시다.

 

내가 [강의]에 대해 느꼈던 불편함은, 과연 이 책이 그러한 용도에 합당하게 읽히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상당기간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라있기도 하였고, 선생 스스로 공중파 방송의 강연까지 맡으셨던 것에 비하여 선생의 발언은 선생께서 바꾸기를 희망해 마지 않는 사회에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더구나 위협은커녕, 사실은 현실에 안주하되 스스로를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있다"는 착각속에 살게하는 수많은 인텔리들에게, "나는 [강의]를 읽은 사람"이라는 또하나의 면죄부를 날리신건 아닌가 말이다. [강의]는 충분히 그렇게 읽힐 수 있는 면을 가지고 있고, 그건 독해의 문제가 아니라 선생께서 현재 세상에 대해 유지하고 계신 입장과 그대로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무야 나무야] 역시 '중앙일보'에서 제작을 지원하여 여행과 글이 나오게 된 책이다.)

 

결국 [강의]는, 읽는 사람의 뜻대로 읽히는 책이 되고 만다. 어떤이에게는 그저 별 위협없는 고전으로, 어떤 이에게는 스스로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지 않은 교양서로, 어떤 이에게는 미래에 대한 구상의 단초로 - 각자의 입맛대로 읽을 수 있다. [강의]는 주목하기에 따라 어느 CEO가 자기 부하직원들에게 인사 E-MAIL의 멋진 문구로 따오기에도 적당하고, 어느 까페에 벽면을 장식할 문구로도 어울린다. 그러나 이를테면 전용철열사의 대책위 천막농성장에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 그 천막의 분위기에 대자면 너무 느긋한 듯한 - 그런 자리에 선다.

 

3. 그러나 지금 당장의 탄알에만 주목하여, 대포를 만들 준비를 하지않을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사실 [강의]에는 20세기를 풍미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고민으로 넘쳐 있다. 현장에 서 있다는 치열함을 이유로 당장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이들을 비난한다면, 운동이란 얼마나 자그마해 질 것인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일 것인가. 누구나 말하듯이 지금의 운동이 위기라면, 위기에 대응하는 길고 짧은 대응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지금의 사회를 굉장한 위기를 잉태하고 있는 사회로 진단한다. 에돌려 에돌려 말씀하시기를 거듭하다 유일하게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목을 보자. "현대 자본주의는 이 누적된 모순으로 말미암아 축적과정 그 자체의 작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전반적 위기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위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금의 세계의 진면목을 은폐하기 위한 고도의 대중조작이 행해지고 있으며 그 절정에 '광고'가 있다고 한다. 이제는 "이성의 포섭뿐만 아니라 감성의 포섭까지 완성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강의]의 총론적인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겠노라 공언하였던 사회주의의 몰락이후 과연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대안적 총론'은 어떻게 씌여져야 할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되겠는가? 안된다. 운동권은 무능하고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퇴락하였다. 노무현정권은 집권하고 있는 하루 하루마다 운동권의 신뢰를 하루 하루 만큼 좀먹어 들어간다. 민노당은? 별다르지 않다. 게시판에서 가장 치열하고 별다른 현실적 해법도 갖고있지 않다. (심지어는 독도에 군대를 보내자는 말도 한다)

 

선생께서는 이런 답없는 시대에 '낭만주의'를 꺼낸다. 모택동이 [초사]를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사회주의이론가인 모택동에게 [초사]의 낭만이 있었기에 대업을 이룬 바탕이 되었다 적는다. [나무야 나무야]에서는 강화학파의 잠행과 기다림을 중국 서역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고비사막을 견뎌내고 지하로 흘러 마침내 황하를 이룬다는 시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선생 역시 고비사막을 흐르고 계신것일까. 모두가 '역사는 끝났다'고 하는 이시대에, "경제가 어려운데 왜 창녀촌을 없애는가"라는 이시대에, "경제가 어려운데 왜 데모질이냐"는 이시대에, 선생은 여전히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 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고 단정하여 말씀하신다. 결국 [강의], 아니 선생의 계속되는 글들은 20년을 갖힌 후에도 선생께서 포기할 수 없었던 변혁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답을 가진이가 지금 누가 있는가. 선생만큼이나 정돈되어 있는 이도 드물지 않은가. 결국, 다시한번 선생의 말씀을 스스로 새길 밖에 부족하다 원망할 일이 결코 아님을 새기게 된다.

 

4.

 

[강의]는 편 마디 마디가 명구절이 많아, 특히나 메모가 많았던 책이다. 책을 읽은 수많은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며, 구절을 옮기는 일은 접는다. 꽃아 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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