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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 대한 정의 중에 "사람들이 모두 이름을 알고 있으나 아무도 읽어보지는 않은 책"이라는 정의가 가장 합당하지 않을까 한다. [사기]도 과연 그러한 책이여서, 사마천과 사기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졌으나 정작 읽은이는 찾기 힘든 책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리뷰를 쓰기 위해 [사기]를 검색해 보니 열전편만 60여권에 달하는 번역본이 있어 생각보다 읽은 이들이 많은 책임을 깨닫게 된다.

사기는 교도소에 읽은 책이다. 그런곳이 아니라면, 사느라 바쁜 사람들이 진득하니 보기는 힘든 책일 게다. 나는 책의 오타를 잡아다 출판사에 보내 다른 책을 하나 받아볼 요량으로 오타를 잡으며 책을 보았다. 다시 꺼내 보니 그때 잡았던 오타표시들만 즐비하고, 정작 책의 줄기를 따라간 메모는 많지가 않았다. 그중 [열전-상]편 (까치에서 나온 사기는 정범진 교수께서 7권으로 완역을 하셨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열전 상중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적어볼까 한다.

- 사람들은 올바른것에 뭉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뭉친다. - 한비자의 죽음.

사람은 솔직하기 힘들다. 솔직하다는 것은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세상은 약점을 잡아먹지 안아주지 않는다. 다 아는 얘기라고? 정작 문제는 '내가 아는 그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었던 바로 그사람들에게 조차 결코 솔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솔직해도 좋을 사람은 세상에 부모와 아내밖에 없는것이 아닐까 싶다. '사적인 감정'을 묻고 '나라를 위한 대의'에 충실해야 하는것이 당연한 일인것 같아도, 나랏일 하는 이들도 사람이기에 그들은 대의라는 명분아래 감정으로 움직인다.

한비자는 그점을 통탄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로서 한 나라를 바로 세울 정책을 가졌으나, 그는 그 정책을 펼칠수가 없다. 우선 그 정책이 권력자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한비자에게 정작 어려운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비책이 아니라, 그 비책이 어떻게 하면 씌여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비자는 말한다.

"송나라에 한 부자가 이었는데, 비가 와서 그의 집 담장이 무너졌다. 그의 아들이 "다시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고, 이웃집 주인도 역시 그렇게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도둑이 들어 과연 많은 재물을 잃었는데, 그 집에서는 그 아들을 매우 똑똑하다고 여기면서도 이웃집 주인에게는 의심을 품었다.....이웃집 주인이 알고 있던것은 모두 타당한 것이었거늘 심한 자는 죽음을 당하고 가벼운 자는 의심을 받았으니, 안다는 것이 아려운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어려운 일이다."

한비자는 결국 진나라의 왕에게 유세하다 실패하여 죽고만다. 그의 말대로 된 셈이다.

사기가 드러내는 놀라움은, 지금으로 부터 2,000여년 전 - 우리의 연대감각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 - 사람들과 우리들이 그 감정과 서로간의 갈등의 모습에서 전혀 다른면을 발결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는 것이다. 첨단 과학문명의 세례속에 자연스레 묻혀살아온 우리들로서는 고대의 사람들은 뭔가 우리들과 생긴것도 좀 투박할것 같고, 사는모습도 다를것 같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어제 신문에 실린 얘기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 사람은, 과연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연을 개조하는 기술만 달라졌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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