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정의란 무엇일까?'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이 던져온 질문이다. 법은 공정해야 하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감정에 흔들리는 판결.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차라리 AI가 재판을 하는 게 더 공정하지 않을까?"
이기원 작가의 디스토피아 SF소설 『사사기』는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한다. 폐허가 된 근미래, 대한민국은 기업의 손에 넘어가고 ‘전국기업인연합(전기련)’이 세운 도시국가 ‘뉴소울시티’는 완전히 새로운 법질서 제도를 도입한다. 수많은 판례와 데이터를 학습한 AI 판사 ‘저스티스-44’가 등장하면서 범죄율 제로의 유토피아가 탄생한다.
완벽한 질서는 완전무결한 정의를 보장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 · 직관 · 맥락은 정말 필요 없는 것일까? 장편소설 『사사기』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을 흡입력 있는 플롯에 담았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오히려 진실을 가릴 수 있다는 역설. 이 작품은 우리가 기술에 품고 있는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응시하며, "누가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되묻는다.
<완벽한 판결에 균열이 생기다>
『사사기』는 초반부터 뚜렷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주인공 우종은 교통사고 현장을 조사하러 나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도시에서 일어난 사망사고라니. 게다가 며칠 뒤엔 고급 아파트에서 폭발 사고까지 발생한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22세기 미래도시 뉴소울시티는 겉보기에 완벽하다. AI 판사 '저스티스-44'는 모든 사건을 빠르게, 그리고 공정하게 판결한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가 환호한다. 불합리한 감정 개입 없이 빠르게 재판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이제 정의를 AI에게 맡기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반복은 균열을 일으킨다. 의문 가득한 사건,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진실. 우종은 사건을 추적하고 그 중심에 저스티스-44가 있다는 걸 직감한다. 우종뿐만 아니다. 감사부 직원 영무, 사회부 기자 재민도 각각의 방식으로 이 거대한 시스템에 의문을 품는다. 이들이 바라는 건 시스템의 붕괴가 아니라 진실이다.
<완벽한 질서란 존재할 수 있는가?>
『사사기』가 그리는 뉴소울시티는 얼핏 보면 이상적인 사회다. AI 판사 저스티스-44가 법을 집행하고, 모든 사건은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된다. 사람들은 그 판단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판결에 이견을 품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반복되는 문제를 '단순한 시스템 오류'로 정리해버리는 모습에 주인공 우종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다. "그런데 왜 매일 사고가 발생할까? 완벽한데 오류가 왜 나는 거야?"(27쪽)
이 작품이 강렬한 이유는 이러한 '오류'를 단순한 시스템의 결함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원 작가는 오히려 그 틈을 통해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정의'의 실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기술로 만들어낸 공정함은 과연 진짜 정의일까? 작가는 이를 흑백의 선택지가 아닌, 회색 지대에 가까운 현실로 그려낸다. "0과 1. 그 사이엔 무수히도 많은 숫자들이 존재하죠. (중략) 정의는 단순히 0과 1,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329쪽) 숫자와 판례로 대변되는 기계적 정의는 인간의 직관, 맥락, 윤리라는 복잡한 요소들을 놓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놓쳐지는 것들'에 집중한다.
장편소설 『사사기』는 정의를 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정의를 묻는 태도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태도는 결코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몫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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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생각이 많았다. 공정함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그 정의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면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기원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에서 그런 불편한 질문은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독자에게 오래도록 남는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해도 결국 정의는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비롯된 감각이라는 사실을 책을 통해 다시금 실감했다.
전작 『쥐독』에서 이어지는 세계관을 프리퀄의 형식으로 더욱 깊이 있게 확장한 장편소설 『사사기』는 기술과 윤리, 신뢰와 의심 사이에서 길을 묻는 문제작이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리사이클러』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특히 이번 작품의 영상화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AI 판사 저스티스-44가 구현된 도시, 뉴소울시티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탄생할지 기대가 크다.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꼭 한번은 마주해야 할 질문을 담은 이 시리즈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