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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부근

칸트는 이름만큼 섹시하지 않다. '임마누엘' 칸트. 한끝 차이기는 하지만, 내 기억의 엠마누엘은 고등학교 시절 3류 동시상영 극장에서 본 [엠마누엘 부인]의 그녀다. 대형 스크린이 아닌 프로젝터로 쏜 앙상한 화면 속의 그녀는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달뜨게 했다. 서양에 엠마누엘이 있었다면 한국엔 애마부인이 있었다. 대마초를 피게 해 달라며 외로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부선.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싱그럽고 도발적이다. 저자가 책 앞날개에서 칸트를 '폭탄'에 비유했듯이, 엠마누엘과 애마부인은 내 삶의 '다이너마이트'였다.

칸트가 인간 '이성'을 얘기했을 때, 엠마누엘과 애마부인은 온몸으로 인간의 '성'을 말했다. '임마누엘 칸트-엠마누엘 부인-애마부인'이라는 야릇하고 엉뚱한 계열의 지도가 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건 전적으로 임마누엘 칸트의 책임이지 내 탓이 아니다. 칸트의 표현대로 나는 계몽되지 않은 '미성년'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칸트와 애마부인의 거리만큼이나 나와 칸트의 거리도 수억 광년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은 내 손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녀들의 모습과 닮았다. 최근에 다시 칸트를 떠올리긴 했다. 앞집에 사는 생후 몇 개월인지도 모르는 꼬마가 있다. 이 녀석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나는 자정이 넘었음을 직감한다. 자정만 되면 울음을 터뜨리는 그 아기에게 지어준 별명이 '꼬마칸트'이다.

칸트는 매번 내 주위에서 때로는 환영으로, 때로는 실재로 머물러 있었지만, 그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힘겨웠다. [순수이성비판]을 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본' 것이다. 책을 펼치고 몇 줄 읽지도 못한 채 덮어버리기 일쑤였던 그 책. 내 주변의 많은 친구들도 그 책을 '보았으나 보지 못했다'. 너도나도 칸트에 대해 떠들지만 그의 철학적 시나리오를 드라마틱하고 섹시하게 떠들어주는 멋진 구라쟁이는 아직 없었다. 아주 절친한 친구의 도움이나 안내가 없다면 다시 그를 만나러 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 만큼 칸트는 손에 닿지 않는 매혹적인 여신상과 같은 존재였다.

진은영 시인은 칸트의 삶과 철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칸트의 삶에 훈훈하고 따사로운 입김을 불어넣어 준다. 내기 당구로 학비를 벌었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던, 때문에 무진장 지루해 보이는 칸트의 삶은 시인의 문장을 투과하자마자 담담한 빛을 머금고 살아있는 육체로 다가온다.

저자의 책을 통해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모두 이해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여전히 어렵다는 건 숨길 수 없는 내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의 책은 [순수이성비판]에 다가가기 위한, 칸트라는 거대한 산을 오르기 위한 친절한 가이드이다. 이 책이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는 건, 칸트 철학에 대한 명징한 해석이 아니라 칸트에 대해서 글을 써 가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다. 시인의 '솔직함'. 아는 만큼 얘기하고 이해한 만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요란한 군더더기도, 아는 척하는 난해한 문장도 없는.

시인의 책은 너무나 높아 보였던 칸트라는 고원을, 그래서 올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게 길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어린 조카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따뜻함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힘들지만 길을 떠나보렴. 그 고원에 올라가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렴. 그리고 넓은 세상을 가슴에 담아보렴. 아주 다양한 빛깔의 삶과 친구가 되렴.

그러나 이 책이 단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리라이팅'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시인이자 철학도인 저자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음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진은영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세계관의 결론이나 보기좋게 정리된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부딪침이다. 하나의 강력한 사유는 언제나 또 다른 강력한 사유와 만나기를, 아니 누군가의 사유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와 부딪쳐 주기를 기다린다"(214면)고 말한다. 부딪침을 경쾌하게 즐길 수 있는 넓은 가슴, 나와 다른 이질적인 사유를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 칸트에게 사유를 할 수 있는 넓은 '이마'가 있었다면, 저자에게는 철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과 허물없이 사귈 수 있는 넓은 '가슴'이 있다. 폭탄 테러만이 일상을 부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단아하지만 유쾌한 책도 둔감한 우리의 일상을 철학의 향수로 물들이는 '향기나는 폭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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