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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부근
요즘 TV를 보면 환경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많다. 그만큼 사람들이 환경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특히 얼마 전에는 모 방송사에서 ‘환경의 역습’을 방송했다. 여기서 다룬 내용은 ‘새 집 증후군’이다. 집을 지을 때 사용되는 건축 자재에서 나오는 유해물질, 특히 포르말린과 같은 발암성 물질이 기준치 이상으로 높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어린아이들의 피부염(아토피) 및 호흡기 장애, 기관지 천식 등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각 방송국의 뉴스에서까지 ‘새 집 증후군’에 관해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각 언론들은 ‘새 집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들을 자세히 보도했다. 그런데 방송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인간중심적이라고. 더욱이 ‘환경’이라는 말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자연을 인간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인간이 활용해야할 그 무엇으로 규정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생태’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새 집 증후군’을 없애는 것은 좋은 환기 시스템의 개발이나 ‘친환경적’ 건축 자재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방법은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인간을 위한 난개발이 아니라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다.

최재천의 ꡔ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ꡕ는 이런 생태계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조명해 준다. 인간의 위치에서 생태계를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이 아니라 생태계 그 자체에 내장된 다양한 풍경들을 광활하게 보여준다. 물론 여러 곳에 실린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다보니 중복된 내용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의 미덕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최재천이 꿀벌과 반딧불이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독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꿀벌은 춤으로 말한다.” 인간처럼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꿀벌은 춤으로, ‘온 몸’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역동적인 춤을 추면서. 더욱이 어떤 사물에 대한 거리는 춤을 추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다른 벌들은 춤추는 꿀벌의 속도에 따라 꿀이 있는 곳의 정확한 거리를 인식한다. 몸으로 말하기. 우리는 언제부턴가 너무나 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허덕거렸다. ‘눈빛만 보아도’ ‘몸짓만 보아도’ 그 사람의 상태를, 그와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반딧불이의 삶으로 얘기가 전개되면, 참 그놈들의 기구한 팔자가 안타깝다. 암컷 반딧불이가 꼬리에 불을 반짝이고 있는 건 “사랑을 나눌 연인을 찾기 위해서다”. 요즘 말로하면 ‘작업’ 중이다. 그런데 옛 선비들은 그 반딧불이를 잡아 어두운 밤을 밝혀가며 책을 읽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형설지공(螢雪之功)’이 바로 그런 선비의 ‘훌륭한’ 자세를 치켜세웠던 말이다. 반딧불이는 교태를 부리며 연인을 구하고 있는데, 그 불빛 아래서 오직 독서에만 전념하는 선비는 정말 ‘대단’하다.

꿀벌과 반딧불이 그리고 개미. 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생태계를 인간은 수탈해 왔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탈했다며 욕을 하지만, 사실 인간은 벌거벗은 몸뚱이만 빼 놓고는 모두 생태계에서 강탈한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계다. 생태계는, 전 우주는 온 몸으로 인간을 위해 노력하는데, 인간은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색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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