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거울
우공이산 2003/08/0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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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계신 할머니께서 대청에서 넘어지셨다. 인천으로 모셔왔고 이 병원 저 병원의 문을 두드렸지만 받아 주는 곳이 별로 없었다. 다리만 다치신 게 아니라 치매까지 있으셨다. 할머니의 알 수 없는 비명과 행동 때문에 병원들의 문턱이 높기만 했다. 겨우 한 병원을 잡을 수 있었고, 주사 한 대에 할머니는 곧 잠드셨다.
'수술은 성공적이다'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문제는 치매였고, 할머니는 나를 막내 삼촌으로 착각하시며 펑펑 우셨다. 거죽만 남은 파리한 할머니의 손이, 그 뼈마디가 내 손을 쥐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시는 걸까. 막내 삼촌에 대한, 작은 아버지에 대한, 고모에 대한, 할어버지의 무덤이 있는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에 마디마다 스며든다.
하지만 삼촌도 작은 아버지도 고모도 할머니를 버렸다. 아버진 할머니를 집으로 모셨고, 어머니는 할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냈다. 할머니는 매일 어머니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심한 욕을 했다. 어머니는 소주를 들이켰다.
일일연속극의 그 많은 행복한 가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없기 때문에 연속극이 만들어진 것일까? 일상은, 우리의 가족은 너무나 지리멸렬하고 남루하다. 진은영 시인의 「가족」이라는 시를 읽다보면 자꾸 내 삶과 겹쳐지며 휘돌아 친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시인의 시들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시인의 청춘과 사랑과 가족과 그리고 일상의 세세한 풍경들이 별무리를 짓는다. 내가 유독 시인의 시들 중에서 ‘가족’에 관한 내용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시인의 가족사와 내 가족사를 포개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다. 시인이 가족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태도 때문이다.
시인은 가족이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응시하되 그 시선이 결코 절망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시인이 생각하는 가족은 단지 가계(家系)의 지형도에 함몰된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자신의 몸과 살이 접속하는 모든 관계들이 시인의 가족이다. 바로 그것이 시인을 옥죄고 있다.
"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 집에 가려면 수챗구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귀가」) 더욱이 시인에게 '집'은 '짐'이 되고 그 '짐'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이 있다. 시인은 자신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짝을 등에 짊어지고 세상을 걸어간다. 그 고통은 절규가 되어 메아리 친다.
"내가 얼마나 피 흘리고서야 잔잔히 떠오르겠습니까" (「달팽이」) 무수한 피를 흘려도 탈출 할 수 없는 고착화된 가족의 관계망. 시인은 나무가 되려 한다. 나무가 되어 "아무에게도 부딪히고 싶지 않"기를 바란다. (「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하지만 나무가 된다고 해도, 수많은 피를 흘린다 해도 시인을 억누르고 있는 '짐'들을 떨쳐 버릴 길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다른 무언가 되고자 한다. 마치 '정육점 여주인'처럼. "오늘 밤에는 들판에 나가야겠다/ 풀 먹인 하얀 앞치마에 가득히 떨어지는 별을 받으러." "미리 갈아놓은 칼로 겨울의 탯줄을 끊어야 한다/ 길고 부드러운 혀로 떨고 있는 어린것을 핥아주는 일." (「정육점 여주인」)
시인이 넉넉하고 때로는 강인한 '정육점 여주인'이 되고픈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 더 이상 어머니가 소주를 들이키지 않기 위해서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 내야' 한다. 창공에 가득한 별들을 받을 수 있는 드넓은 가슴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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