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공리주의>
(Utilitarianism)
(철학사상 별책 제2 제9호)
김영정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99쪽
(20.4.9. - 20.4.15.)
<자유론>이나 <공리주의>(On Utilitarianism)가 밀의 생애 중반기에 쓰여진 주요 저작이라면 ꡔ논리학 체계ꡕ(System of Logic)나 <정치경제학 원리>(The Principle of Political Economy)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은 그 이후에 쓰여진 밀의 주저들이다. 특히 ꡔ여성의 예속ꡕ은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주의(feminism)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최근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P.6)
벤담(Jeremy Bentham)의 저술들이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법률에 적용시키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윤리이론과 관련된 밀(John Stuart Mill)의 저술들, 특히 <공리주의>(On Utilitarianism)는 이처럼 공리주의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유럽 대륙의 철학자들에 의해 공리주의에 제기된 물음들과 밀 스스로 확인한 의문들에 답하기 위한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개요’, ‘공리주의란 무엇인 가?’, ‘공리의 원리의 궁극적 제재에 대하여’, ‘공리의 원리는 어떻 게 증명되는가?’, ‘정의와 공리의 관계에 대하여’ 등의 총5장으로 구 성되어 있는 이 책은 ‘공리’와 ‘쾌락’의 어의적 부정합성에 대한 해 명을 포함하여 공리주의와 여타 이론들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 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리주의는 인간의 특성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즉 공리주의는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여타 존재 ― 가령 돼지 ― 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비판에,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이른바 ‘질적 공리주의’로 응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밀에 따르면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천 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바보천치나 돼지가 어떤 다 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 각자 의 입장만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보천치나 돼지에 비교 되는 상대방은 양쪽 모두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7)
공리의 원리 principle of utility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최대 선 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 키지 않는 희생이나 증대시키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無 用之物)로 간주된다. 공리주의가 인정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행복의 수단인 어떤 것에 대한 헌신뿐이 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든, 인류전체 이익 의 범위 내에 있는 개인이든 모두 무방하다.
(P.19)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것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공리주의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정당한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행위자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 해야 할 때,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제3 자처럼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요구한다. 나사렛 그리스도의 황 금률 가운데서 우리는 공리주의 윤리의 완전한 정신을 찾아낸다. 스스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 라는 것은 공리주의 도덕의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극치이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공리는 다음과 같이 명령할 것이다. 첫째로 법률과 사회적 장치가 모든 개인의 행복이나 (보다 실제적으로 말한 다면) 이익을 가능한 한 최대로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해야 하고, 둘째로 교육과 여론(與論)은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대한 힘을 가지 고 있는데, 이 힘을 이용해서 각 개인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즉, 자신의 행복과 사회전체의 선 사이에는 결코 녹아 없어져 버릴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자신의 행복과 보편적 행복에 관해 규정하는 ―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 행동양식의 실행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을 교육과 여론이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일반적인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는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일반적인 선을 증진시키려는 직접 적인 충동은 각 개인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될 것이고, 이 러한 충동과 결부된 심정은 각 개인의 정조(情調)면에서 넓고 현저한 위 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P.19)
공리의 원리의 증명 (the proof of the principle of utility)
이상의 고찰로부터 실제로 소망되는 것은 행복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그 자신을 초월한 목적, 즉 궁극적으로 행복 의 수단이 되는 것 외에 소망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 행복의 일부로서 소망될 것이다. 행복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에서 그 자체를 위해 소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덕 그 자체를 위해 덕을 구하는 사람 은 덕을 의식하는 것이 곧 쾌락이거나 덕의 결여를 의식하는 것이 곧 고 통이기 때문에, 또는 양쪽 모두의 이유가 겹쳤기 때문에 덕을 갈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쾌락과 고통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거의 언제 나 함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도 얻게 되는 덕에 따라 쾌 락을 느끼고, 그 이상 얻지 못하게 될 때 고통을 느낀다. 덕을 얻어도 쾌 락을 느끼지 못하고, 덕을 상실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누가 덕을 사랑하고 덕을 구하려 하겠는가? 이런 덕은 구한다고 한들 겨우 덕이 자 기 자신이나 자신이 보살펴주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익을 조금 줄지 모른 다는 것이 고작이다. 이로써 우리는 공리의 원리가 어떤 종류의 증명을 허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심리학적으로 참이라면, ― 다시 말하면 인간 본성이 행복의 일부도, 행 복의 수단도 아닌 것을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게끔 구성되어 있다면, 행 복의 일부인 동시에 행복의 수단인 것만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이란 사 실 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그밖에 다른 증명 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유일한 목 적이며, 행복의 증진은 모든 인간행동을 판단하는 판정기준이 된다. 이로 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즉, 행복이야말로 도덕 의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분, 즉 행복의 수단은 전체, 즉 행 복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37)
공리주의와 정의
왜 유독 공리주의에서 정의(justice)가 문제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 해서는 먼저 정의의 개념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흔 히 우리는 정의(justice)를 문자그대로 정의(正義)로 해석하여 종종 정 의와 옳음을 동의어로 취급하곤 한다. 그러나 유럽어 권에서 정의 (justice)는 이른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즉 제반 가치를 분배하는 사회적 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는 비록 각자의 정의관 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더라도 언제나 최고 덕의 지위를 차지하는 개념 인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따르면 정의를 포함한 모든 윤리적 덕목들 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원리의 지위만을 부여받 는다. 동일한 맥락에서 정의도 종래의 최고 덕의 위치를 상실하고 공리의 원리에 따라 강조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부차적인 덕이 되고 마는 것이 다.
물론 정의와 공리의 원리의 이러한 마찰은 공리주의자에게는 이론적으 로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두 가지 전략을 통해 공리주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우선 정의라는 덕목 자체가 공리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 나아 가 정의는 공리주의적 틀 내에서도 유의미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도 덕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밀은 도덕법칙이 처세의 목적으로 준수되는 다른 법칙들보다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 복지의 본질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점을 해명 함으로써 정의나 권리 개념이 더욱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다는 것을 입 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리의 원리의 일종으로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칙(no harm principle, 그 중 에는 상호간의 자유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포함되어 있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준칙보다 중요한 준칙이라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P.38)
정의의 관념
정의의 관념은 다음 두 가지, 즉 행동의 준칙과 준칙을 제재하는 심정을 전제한다. 전자[행동의 준칙]는 인류전체에 공통 적인 것을 전제하며, 인류의 선을 지양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후자[심정] 는 이 준칙을 위반하는 사람을 처벌하려는 욕구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이 런 위반으로 인해 고통받는 분명한 피해자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즉, (이 경우에 적절한 표현을 찾아 사용한다면) 피해자의 권리가 준칙의 위반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의 심정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공감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 반격하고 복수하 려는 동물적 욕망이 인류의 공감을 확대시키고 인간의 현명한 이기심을 개념화하는 능력에 의해 모든 사람을 포괄하게끔 확대시킨 것처럼 보인 다. 현명한 이기심으로부터 감정은 도덕을 이끌어내고, 공감의 확대에 의 해 특별히 사람을 가동시키는 힘과 자기주장을 펼치는 힘을 이끌어낸다.
(P.49)
정의와 편리(공리)
정의는 어디까지나 다음과 같은 어떤 사회적 공리를 나타내는 데 적절 한 이름이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종 (種, class)으로서 어떤 다른 공리보다도 특히 중요하고, 따라서 보다 절 대적이고 명령적인 공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정의라는 사회적 공리 는 정도 상으로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심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보호되고 또한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은 단지 인간의 쾌락이나 편의를 촉진시킬 뿐인 관념에 부수하는 보다 온화한 감정과 구별되는데, 이 구별 은 명령의 보다 분명한 본성에 의해 그리고 제재의 보다 강력한 성격에 의해 생겨난다.
(P.54)
칸트(Immanuel Kant) 비판
지금 이런 선천적인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 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례로서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상가의 한 사 람인 칸트의 체계적 저작 <도덕형이상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사상체계는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로 철학적 사색의 역사에 오랫동 안 길이 남을 것이지만, 이 탁월한 사상가는 방금 말한 저작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거로서 보편적 제1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네 행위의 격률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 법칙으로서 채택되도록 행동하 라.” 그러나 칸트가 이 교훈으로부터 실제적인 도덕성의 의무를 연역하 고자 했다면, 그는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 틀림없고, 해괴하게도 모든 이 성적인 존재가 가장 극악무도한 비도덕적 행위의 법칙을 채용한다는 어떤 배리(背理)현상을 나타내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 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즉, 그가 제시하려 한 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결과가 어느 누구도 결코 그 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결과라는 점이다.
(P.59)
공리, 쾌락, 행복
벤담(Jeremy Bentham)에 따르면 “공리(utility)는 어떤 것이든 이해 관계가 걸린 당사자에게 혜택, 이점, 쾌락, 선, 행복(이 경우에 이 모든 어휘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그것은 고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을 가져다 주거나 불운, 고통, 악,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그러한 속성을 의미한다.”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벤담의 쾌락주의적 공리, 쾌락, 행복 등의 개념을 대체로 수용한다. 그러나 밀은 벤담과 달리 쾌락은 단순히 동질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쾌락을 향유하는 주체에 따라 쾌락의 질 (質)이 현격히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밀에 따르면 “만족한 돼 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천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 는 것이 더 낫다.” 바보천치나 돼지가 어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더 라도, 그것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 각자의 입장만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보천치나 돼지에 비교되는 상대방은 양쪽 모두 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67)
쾌락의 질
공리의 원리는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 하고, 한층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양 외에 질도 고려하게 되는데, 유독 쾌락을 평가할 때만 양에 의존하라 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쾌락에서 질적 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쾌락이 단 순히 양적으로만 다른 것보다 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쾌락 그 자체로서 다른 쾌락보다 가치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두 개의 쾌락 중에서 양쪽을 모두 경험한 사 람이나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선택해야 할 도덕적 의무감에 관계없이 결연히 선택하는 쪽이 보다 바람직한 쾌락인 것이다. 양쪽을 잘 아는 사 람들이 두 개의 쾌락 중에서 하나를 훨씬 높게 평가하고, 이런 선택이 보 다 큰 불만을 동반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다른 쪽의 쾌락을 맛볼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쪽이 나타내는 쾌락 의 양 때문에 본래 쾌락을 버리지 않고 이 쪽을 선택한다면, 선택된 쾌락 의 향유는 질적으로 우세한 것이고 또한 양을 압도하기 때문에 양자를 비 교할 때 양을 거의 문제삼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P.69)
공리와 편의 utility and expedience
다시금 공리는 종종 편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말을 원리와 대립시켜 온 통속적인 용법을 이용하여 공리주의를 비도덕적 학설로 아주 간단하게 낙인찍어 버린다. 그러나 편의는 권리와 대립시켜 사용할 때, 이를테면 정 부관리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경우처 럼, 보통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개인적 이익에 대해 편리하다는 의미로 사 용되고 있다. 이보다 다소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어떤 직접적인 문제나 일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편리한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높은 단계 에서 규칙을 지키면 훨씬 편리하게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규칙을 파괴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편의의 의미가 이쯤 되면, 유용하다기 보다 오히려 유해한 것의 일부가 되고 만다. 이처럼 한때의 고통스러운 순 간 또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역경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 때로는 편리할지 모른다.
(P.75)
공리의 원리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최대 선 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 키지 않는 희생이나 증대시키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無 用之物)로 간주된다. 공리주의가 인정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행복의 수단인 어떤 것에 대한 헌신뿐이 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든, 인류전체 이익 의 범위 내에 있는 개인이든 모두 무방하다.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것을 나 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공리주의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정당한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행위자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 해야 할 때,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제3 자처럼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요구한다. 나자렛 그리스도의 황 금률 가운데서 우리는 공리주의 윤리의 완전한 정신을 찾아낸다. 스스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 라는 것은 공리주의 도덕의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극치이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공리는 다음과 같이 명령할 것이다. 첫 째로 법률과 사회적 장치가 모든 개인의 행복이나 (보다 실제적으로 말한 다면) 이익을 가능한 한 최대로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해야 하고, 둘째로 교육과 여론(與論)은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대한 힘을 가지 고 있는데, 이 힘을 이용해서 각 개인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즉, 자신의 행복과 사회전체의 선 사이에는 결코 녹아 없어져 버릴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자신의 행복과 보편적 행복에 관해 규정하는 ―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 행동양식의 실행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을 교육과 여론이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일반적인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얻 으려는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일반적인 선을 증진시키려는 직접적인 충동은 각 개인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될 것이고, 이 러한 충동과 결부된 심정은 각 개인의 정조(情調)면에서 넓고 현저한 위 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공리주의 도덕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참된 성격을 안다면, 그들은 다른 도덕이 지닌 어떤 장점을 공리주의 도덕이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지 나는 모른다. 또한 다른 어떤 윤리체계가 인간성을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증진시킬 수 있을지, 이 윤리 체계는 윤리적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 공리주의가 갖지 않은 어떤 동기 에 의존할지 나는 모른다.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