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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zzang님의 서재

(519) 판타스틱 과학클럽 (2020-07)​

판타스틱 과학클럽

최지범 / 스윙밴드 / 284쪼

​(2.28-3.1)

법과 제도가 그러하듯이 과거의 전통이 때로는 편리함을 방해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류와 전자일 것이다. 전선에서 전기가 흐를 때 양전하를 가진 양성자는 가만히 있고, 음전하를 가진 전자가 움직이면서 전기에너지를 전달한다. 전자가 발견되기 전, 과거 사람들은 양전하를 가진 무언가가 움직이면서 전기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을 가지고 전류가 흐르는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전자의 실제 흐름과는 방향이 반대였다. 2분의 1의 확률게임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전자가 발견되고 나서도 사람들은 그냥 예전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그전까지의 교과서, 논문, 자기장에 대한 법칙 등 바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전자의 흐름과 전류의 방향은 반대'라고 배우고 있다.

(P.37)

과학용어는 과학자들이 사용하지만, 과학자 또한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일원이기에 불편한 전통이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과 근거에 따라 규칙을 찾고, 잘못된 규칙은 바로잡아 갱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과학자들조차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쉽게 탈피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경제학과 사회심리학에 등장하는 개념인 경로의존성은 불편한 체계라도 기존의 관습과 우연에 의해 표준으로 정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체계를 바꿀 경우 그간 축적된 수많은 논문과 저작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후세 사람들이야 편하겠지만 당신은 그런 과도기를 견뎌낼 인내심이 있는가? 그런 과도기에는 인공위성이 추락하고 발전소가 멈추는 혼돈이 올지 모른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두려움 탓에 불편한 관습은 자신의 경로를 굳건히 유지한다. 우리의 뇌에는 상당히 커다란 관성이 있어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갈 뿐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다.

(P.41)

수학적 논리와 공리, 정리는 순전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이지만 자연을 설명하는데 놀라올 만큼 유용하다. 중학생 때 나는 물체가 날아가는 궤적을 간단한 수식으로 정확히 예측 할수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랐던 적이 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측이 안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답이 수학이었다니!

비단 하나의 물체만이 아니다. 수백 년 후에 태양계 행성이 어느 위치에 있을지도 수학을 통해 예측할 수 있고, 빛이 얼마나 굴절되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게다가 실험이 불가피한 다른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워서도, 서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연구할 수 있다.

가우스는 수학을 과학의 여왕이라고 했다. 특히 현대물리학이나 이론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수학자만큼이나 수학을 잘해야 한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미분방정식, 복소함수론, 현대대수학 같은 수학 과목을 매우 잘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수학을 꼭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다른 분야에서도 점점 수학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지금 세상은 전 분야의 과학화 및 전 과학의 수학화를 겪고 있다. 생태학이나 지질학처럼 예전에는 수학을 많이 사용하지 않던 분야에서도 수학적 분석과 모델링, 통계 처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신(神)의 언어라고 불리는 수학은 이제 인류가 반드시 익혀야 할 신어(新語)가 되어가고 있다.

(P.67)

철학계의 빛나는 별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행동이 선한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편성의 정식을 제안했다. 칸트는 어떤 행동이 보편화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해보라고 말 한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약속을 어긴다고 가정해보자. 그릴 경우, 남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알기 때 문에 그 누구도 약속을 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개념과 목적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약속의 존재를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했는데, 약속의 개념이 사라져버렸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러한 보편화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약속을 어기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칸트가 제안한 이 보편성의 정식은 귀류법을 상기시킨다. 만일 비윤리적 행위가 모순을 일으킨다는 윤리학의 귀류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어디선가 모순적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세상은 어떤 모습 일까?

(P.92)

인간과 세계는 이성으로 되어 있어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 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한다. 세기의 대살인마가 활개치고 다녔을 때는 아주 강력한 창과 아주 강력한 방패가 부딪혀 방패에 금이 가고 창이 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방패는 창을 막지도 막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반면 창은 방패를 뚫은 것도 뚫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왕이 국가의 금고를 횡령했을 때는 역사상 처음으로 산에서 좀비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다. 좀비는 죽지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존재였다.

역사에 따르면, 꽤 최근까지 이런 모순적 상황의 발생은 신의 존재증거로 여겨졌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반대 진영에서는 '그렇다면 중력의 존재와 시간의 존재 역시 신이 있다는 증거냐?'라고 반문한다. 자연 자체를 신이라고 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귀류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오류로 돌아간다는 뜻의 이 증명기법은 잘못된 가정은 모순을 낳는다는 성질을 이용해 잘못된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잘못된 가정의 반대가 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점차 세상이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P.95)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과 진실의 세계인 이데아를 보지 못한 채 그 투영된 모습만을 본다. 그는『국가』에서 동굴 속 죄수의 비유를 사용했다. 동굴 속 한쪽 벽에는 불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물의 그림자만이 비춰진다. 그 벽만을 보게 몸이 묶여 있는 죄수는 사물의 일렁이는 그림자만 볼 뿐 그림자의 원인이 되는 사물은 볼 수 없다. 통계처리 또한 이러한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진실은 정확히 보지 못하고 늘 표본으로부터 진실을 추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과 조사를 통해 우리는 동굴 속 죄수처럼 진실의 단편 만을 엿본다. 미약한 인간에게 추정은 불확실성에 대한 '미력하나마' 최선의 대응이다.

(P.111)

슈뢰딩거의 고양이 논변에서 확률적 불확실성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입자가 여기저기에 퍼져서 존재하는 성질이다. 이중슬릿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개의 전자가 어느 슬릿으로 통과했는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간섭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전자는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 정말이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떻게 된 걸까? 물론 고양이는 신비로운 전자가 아니고, 살거나 죽거나 단 하나의 상태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대로라면, 고양이는 죽어 있는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즉 고양이의 생사 여부는 상자가 닫힌 동안에는 겹쳐 있다가, 우리가 상자를 여는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하듯이 어느 하나로 결정된다.

전자도 그렇고 고양이도 그렇고, 우리의 무지(無知) 때문에 중첩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라는 성질 때문에 여러 상태가 중첩되었다가 하나의 입자로 뭉치는 것이지, 우리가 진실을 모르기 때 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P.160)

양자역학은 화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자 주위에 있는 전자에 대해서도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그 퍼짐 정도와 형태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지 않다. 전자는 원자 핵 주위에 마치 구름처럼 퍼져 있다. 따라서 원자를 생각할 때 커다란 원자핵과 그 주위를 '공전'하는 전자를 떠올리는 것은 직관적이지만 사실에 가까운 비유는 아니다.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 역시 이러한 전자구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 할 수있다.

거시적 세계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인간의 뇌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양자역학적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물리학자에게 물어봐도 딱히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자연이 그렇게 생겼다. 이런 점은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자 (自)에 그러할 연(然). 스스로 그러한 것, 그것이 자연이다. 어찌 보면 대학의 물리학과는 거시세계에 적응해버린 인간의 뇌를 스스로 그러한 것들에 친숙해지도록 개조시기는 곳일 수 있다.

(P.161)

지금의 인공지능은 주로 분석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지식과 기술을 창조할 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기술과 지식의 발전 속도가 인간보다 빨라진다면, 인류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술의 지성이 인간 지성을 추월하는 순간을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고 부른다. 세계전쟁 같은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류의 과학기술은 계속 진보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과 국가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기술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많은 전 문가들이 프로그래머들과 협력하여 자신의 밥줄을 위협할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료영상 분석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는 영상의학과 의사처럼 말이다.

핵무기를 개발할 때도 악마의 무기를 만들고 싶진 않지만 적이 만든다면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다. 모두가 협력하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음에도 달콤한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처럼 결국 우리는 특이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기술개발에만 목매다가 디스토피아를 자초해서는 안 될 것 이다. 인류의 멸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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