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활자중독자의 옹알이
  •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16,200원 (10%↓900)
  • 2026-01-22
  • : 20,795

1946년에 태어나 올해로 여든이 된,

노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줄리언 반스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로 처음 만났는데,

그 때 이후로 대륙 멀리 떨어진 내 마음 속 작가에게는

시간이 멎어있다고 생각한 건지..

이 분이 이렇게 연로한 모습으로

마지막 작품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

사실 그의 소설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천천히 읽고, 다시 읽어야 할 책들로 여겨져왔는데,

내가 나이가 들면서 그의 작품의 깊이를

이전보다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밀란 쿤데라의 날카로운 시선과

이언 매퀸의 고급스런 영국식 유머를 섞어놓은 듯한 그의 글은

한 번만 읽고 덮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대작가로 많은 글을 쓰고 이제는 암투병을 하며

남은 생을 평화롭고 고요하게 보내리라는 그의 뒷모습에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 한 켠에는,

이제 더 이상 삶의 통찰을 담은 그의 소설을 볼 수 없을거라는

아쉬움도, 독자로서 당연한 감정이리라.

​



표지를 넘기면 줄리언 반스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적혀 있다.

원제목 <Departure>가 아니라 한국어판 제목

<What has left will not return>으로 언급한 것이 인상적이다.

떠남, 출발이라는 원제목의 의미를 충분히 담았다고 공감했던 걸까.

그는 이 소설이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결합된 하이브리드이며,

스스로 감사와 작별인사를 담은 "마지막 책"임을 밝히고 있다.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았다면 적어도 스무 권 이상의

그의 소설이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위로처럼 건네지만,

그 유한함, 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조금 슬퍼진다.

독자의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

원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떠남', '출발', 이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

"떠남은 대개 도착에 이른다. (..)우리는 가고, 우리는 도착하고, 우리는 귀환에 나서고, 다시 집에 다다른다. 우리는 그런 타성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그런 궤도는 더 크고 더 모순된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우리 삶에서는 도착이 먼저 오고 떠남은 마지막에 온다. 도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떠남이지만​."(p.215)

​

맥락을 좀 다르지만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에 나왔던

"우리는 출발지에 도착한다"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줄리언 반스의 말대로 우리가 태어난 것을 이 세상에 '도착'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이승우 작가의 말처럼 삶의 끝에 '도착'한 후 맞닥뜨리는 것은

어디로 도착할지 모르는 '출발지'일 수 있다.

우리는 그 출발지에서 어떤 곳으로 '떠난다'.

줄리언 반스는 그 출발지에서 '떠남'을 준비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

그는 쇠퇴를 인정한다.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우리의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라는

플로베르를 인용하면서,

몸의 일부가 수십 년 동안 천천히 기능이 약해져왔으며(p.259)

이제는 혈액암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특수한 종류인 이 골수 증식성 종양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며 그 또한 그걸 죽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저 병이 광포해지는 걸 막으면서 그는 암과 함께

"죽는 날까지 팔짱을 끼고 터덜터덜 갈 것이다"(p.360)

​

"나로 말하자면, 나는 이제 일흔여덟이고 이것이 분명히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떠나고, 이 책은 나와 당신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나 자신이 고른 시간에 마지막 책을 끝내고 입을 다무는 것에는 적어도 한 가지 유용한 결과가 있다. 뭔가를 쓰던 중간에(..) 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런 식으로 죽음에 선택권을 넘겨주지 않고 있는 셈이다."(p.252)

​

이 책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함으로서

육체적 인간으로의 존엄을 넘어서 작가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

아, 그래서였구나..

독자의 입장에서

그의 작품이 더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애석해하던 아쉬움을 싹 거두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기로 한다.

​

이 책은 기억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강렬한 스토리가 있는 소설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줄리언 반스는 "기억은 정체성이다."(p.20) 라고 선언하며

"우리 안에 저장된 IAM이 합쳐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또 과거에는 어땠는지 보여주게 된다."

라고 말한다.

IAM은 Involuntary Autobiographical Memory,

즉 불수의 자전적 기억으로 번역된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사례가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와 마들렌이 불러일으킨 기억들이

이책 이외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된다.)

​

줄리언 반스는 기억을 화두로 그의 기억력,

과거의 기억들과 기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사유한다.

필연적으로 노화와 연관지을 수 밖에 없는 여러 질문들이 수반된다.

​

"상상해 보라, 그냥 상상해 보라. 당신은 늘 간신히 꿈이나 꿀 수 있을 것 같던 일을 해서 '작가가 되었다'. 심지어 성공을 거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인생이 끝날 무렵에는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이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의 망각. 당신이 의도하고 구축하여 세상에 내놓은 모든 것이 당신이 뇌에서 지워져 버린다."(p.238)

​

"글을 발표한지 44년이 지나니 내가 나 자신을 반복하기 시작하고, 똑같은 낡은 비유와 밈으로 돌아가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말을 되풀이하고, 심지어(실제로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내 우스개마저 반복한다는 느낌, 또는 생생한 두려움도 있다."(p.247)

​

또 한편으로는 옛 커플이었던 친구 스티븐과 진을,

40여년이 지나 다시 이어주면서 옛 기억과 현재의 삶을 이어붙이려는

노력을 해 보기도 한다.

​

"그래,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사귀게 되면 만족감도 더 커진다. 갑자기 당신이 있는 곳에 완전히 신선하고 익숙하지 않은 삶이 나타난다. 발견되지 않은 과거와 아직 탐험해야 할 미래가 눈앞에 있다. 따라서 지금 이야기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새로운 새' 친구의 즐거움이다. 반면 '새로운 오랜' 친구를 실제로 사귈 수 있다면, 자족감과 사내들만의 편견에 젖어들기 십상일 게 분명하다. 감상에 푹 젖어 코르덴 바지를 입고 파이프를 씨으며 맺는 유대감 비슷한 것."(p.1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오랜' 친구로

과거의 커플을 다시 연결해주었고,

40년의 공백이 있는 그들을 관찰하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들이 다시, 두 번째로 서로를 떠나자

스스로 삶과 픽션을 혼동하고 있었다고 반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옛날과 달리 초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공정하다고, 또는 공정해야 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아마도 종교적 믿음의 찌꺼기 때문일 것이고,

사실 노년의 그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는 간단한 구절은

"우주가 그냥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p.200)라는 것이다.

​

책 전체가 그 간 작품활동을 하면서 못다 한 말들,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 정리와 고백으로

견고하고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

그의 기억(과거)과 통찰 외에도

예술의 불멸성에 대해 남은 우리들에게 던지는

서늘한 메시지도 있다.

​

"우리는 이 행성을 날려버리면서 그와 더불어 모든 예술도 날려버릴 것이다. 아니면 생존은 하겠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현재의 우리, 신과 사랑과 행복과 예술을 소박하게 갈망하는 우리와는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진화할 것이다."(p.211)

이 책의 끝을 오래오래 기억하리라.

​

"그럼에도 오랜 세월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기쁘게 여겼기를 바란다. 나는 분명히 그랬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p.263)

​

작가는 마지막으로 상상했다.

독자와 함께 어딘지 모르는 어느 나라의

어딘지 모르는 어느 소도시의 한 카페 실외석에 앉아있는 이미지.

날씨는 따뜻하고 우리 앞에는 시원한 음료가 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우리 앞의 다양한 삶의 표정을 바라보다,

그가 독자인 나에게 다정한 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내 팔에 살짝 손을 얹고 계속 앉아 있으라 말하고

뒷모습을 보이며 자리를 떠난다.

​

잘 가요. JB.

​

잘 가요, JB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네이버 블로그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