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雖不常勝 而恒上昇
  • 세계의 역사 2
  • 윌리엄 맥닐
  • 17,100원 (10%950)
  • 2007-03-12
  • : 1,920

 1500년은 세계사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유럽인이 시도한 각종 항해는 지구상의 바다를 그들의 통상과 정복을 위한 공도(公道)로 바꿔놓았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모든 해안지방에 새로운 문화적 전선을 구축했는데, 그 전선은 과거 수세기 동안 아시아의 문명이 스텝지대의 유목민과 대치하던 육상 경계선에 필적할 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결국에는 그것을 능가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_ <세계의 역사 2>, p453


 맥닐의 세계사에서 1500년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전까지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뒤쳐진 유럽문명이 이를 기점으로 세계의 중심지로 도약했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변환점이 된다. 1500년 전 문명 간 영향을 미치던 상호연관성은 이 시기 이후 '중심부-주변부'의 관계로 파악되며,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세계사의 부정합'을 말하는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맥닐에게 비서양 세계의 역사는 서양에서 울렸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이 점에서 <세계의 역사2> 또한 서구중심주의적인 세계사임을 실감하게 된다. 


 1500년 이후 유럽사의 시대구분은 세계사의 기준과 잘 맞지 않는데, 이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근대사의 주제가 서양이 발흥하여 전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이라면, 유럽 자체의 단계적 발전이 다른 민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대륙에 그 충격을 미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시차를 감안하여 1700년까지의 비서양세계의 역사와 1648년까지의 유럽 내부의 역사를 함께 묶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_ <세계의 역사 2>, p456


 저자는 1500년 직전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세계의 자기변용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촉발된 다원성이 새로운 변화를 가능케 한 것으로 파악한다. 교황과 황제, 군주와 제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종교와 과학 등등. 수많은 분야에서 촉발된 다양한 종류의 갈등이 미봉합된 상태에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힘이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이루었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주의(Imperialism)시대를 열었음을 말한다.


 1870년 무렵까지 산업혁명의 중심지는 영국이었다. 그 후 동쪽의 독일과 서쪽의 미국이 영국의 산업기술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1789년 이후 민주혁명의 중심지는 프랑스였다. 군주제 관료정부의 결함이 드러나고 공중(公衆)의 비판적 기질이 분출된 결과, 이성과 국민의 의지에 따라 전통적인 정치제도를 개조하려는 장기적이고 정열적이며 신중한 노력이 개시되었다. 이 두 가지 거대한 운동은 최초의 중심지로부터 서양세계 전체로 퍼져 나갔고, 오래지 않아 서양문명의 경계를 넘어서 확대되었다. _ <세계의 역사 2>, p593


 <세계의 역사 2> 에서 저자는 1500년을 전환점으로 새로운 변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으며,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이라는 두 개의 큰 줄기에서 피어난 제국주의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20세기 전반을 규정하는 핵심 특징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제국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일어난 세계대전과 식민지들의 독립이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이라는 틀에서 바라본다. 이 같은 관점에서 여전히 중심부-주변부 이론은 유효하다. 헤게모니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졌을 뿐.


 과학과 기술, 그리고 부강한 나라로부터 힘의 비결을 배우려는 약소국과 약소 민족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세계를 통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지리적 차이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자국의 문화전통을 보존하길 원하는 바람은 그 반대방향으로 작용했다.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과거와의 문화적 연속성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왔다. _ <세계의 역사 2>, p591


 위에서 보듯, 맥닐의 <세계의 역사 2>는 서구 중심적인 세계사다. 유럽문명은 중심부인 반면, 비유럽문명은 미개문명으로 유럽문명이 이룬 성과를 빠르게 받아들였을 때 진정한 문명으로 거듭난다는 저자의 논리는 책이 쓰인 1990년으로부터 35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유럽사=세계사'라는 서구중심적인 세계관을 알게 되고, 그 한계를 체감한다면 나름의 독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일본인처럼 유럽 문명과의 접촉이 제공한 기회를 십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 민족은 아시아에 없었다. 다른 민족은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 만연해 있던 것 같은 문화의 이원성과 대립적인 이념 간의 긴장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_ <세계의 역사 2>, p585

1500년과 1648년 사이 유럽에서는 지적 다원성이 유럽의 토양에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중세에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론상으로는 정연하게 공식화된 지식이 세계를 이해하는 완전한 구도를 제공해주었다. 그런 종류의 지식이 사라지자, 교회/국가/직업이 저마다 자기 나름의 입장에 따라 진리를 추구했다. 이런 다양성으로 인해, 유럽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지속적이고 아주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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