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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님의 신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를 읽었어요. 정보라 작가님이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2023년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어 출판계가 떠들썩할 때에도 작품이 왠지 무서워보여서 못 읽었는데 이번 책은 표지 분위기도 밝고 제목도 유쾌해서 기대감이 생겼어요.
자전적 SF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에서부터 빵터졌지 뭐예요.
자전적 소설도 알겠고 SF소설도 알겠는데 자전적 SF소설이라니,
정보라 작가님은 삶을 SF처럼 살아오셨단 말인가요?
목차도 범상치 않아요. 연작소설집인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에 실린 단편들의 이름은 문어,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
대체 무슨 내용일까. 해양 동물을 소재로 한 자전적 SF 소설?!?!?
도무지 연결성이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이잖아요.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잔뜩 띄우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 시작부터 너무 웃겼어요.
"그걸 대체 왜 먹었습니까?"
"아니 그냥, 잠결에 이렇게 보니까 뭐가 여기로 오고 있어서..."
"그렇다고 뭔지도 모르고 그걸 먹어요?"
"뭔지도 모르긴요, 문어잖아요."
"무슨 근거로 그게 문어라고 확신했습니까? 잠결이었다면서요?"
"그냥, 딱 보니까 문어같이 생겼던데..."
"그렇다고 그걸 먹습니까? 대학교 건물 복도에 문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이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이냐고요.ㅋ
강사법 시행에 반대하는 대학 노조의 농성 현장에서 만난 나와 위원장님(이후 남편)은 복도를 걸어다니는 문어를 목격한 이후 계속해서 노동 착취 당하다가 잡혀온 러시아 대게, 사기꾼에 의해 불법 수조에 갇힌 붉은 상어 , 큰 덩치 덕분에 여유로운 개복치, 하늘에서 성운으로 빛나는 해파리, 지구를 떠나는 검은 고래를 마주치거나 얽히며 자꾸 해양정보과 소속이라는 검은 정장 덩어리들에게 끌려가는 일이 반복돼요. 이 이야기들이 엄청 빠르게 전개되면서 유머러스해서 꼭 '맨인블랙' 같은 코믹SF영화 같은데, 그 안에서 그리고 있는 사회적 배경은 전혀 코믹하지가 않지요.
첫 수록작 문어의 배경이 시간강사법 개정으로 인한 강사들의 대량 해고 사태잖아요. 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아서 남다른 동질감을 느끼며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 후반부에 '그리고 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 이렇게 싸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숨죽이고 12년 동안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263쪽)'는 문장에서는 서글픔에 눈물을 삼켰네요.
그밖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 등 국제적 사회 이슈도 나오고 노동, 장애, 기후 위기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자연스럽게 등장해요.
작가님은 그 문제 제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도 소설 속에서 알려주고 계세요.
그것은, '싸워야 한다는 것'
싸운다는 말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와요.
이길 것 같지 않아도(66p), 열받으니까, 안 싸울 수는 없으며(67p)
질 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끌려 나가 사라지더라도(69p)
선우한텐 선우의 방식이 있(179p.)는 것처럼
자기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존엄하기 위해, 자유롭기 위해 싸우고 있다(244p)는 것.
그리하여 지구 생물체인 우리는 결코 항복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