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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 마음
  •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 13,500원 (10%750)
  • 2022-09-02
  • : 67,593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이 책이 나왔다. 

정지아 선생님의 소설이다. 

그녀와 인사동 어딘가에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단풍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주변 사람이 단풍을 보고 느꼈다던 감수성을 얘기했었는데… 그 자리가 선연한데도 이야기는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죽을 때는 그 얘기들도 한번에 다 지나갈까. 예전에 토끼 한 마리를 키우다 아파서 그 토끼를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 그런가 밤새 간호를 하다 숨을 못 쉬는 토끼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숨을 쉬게 해야 하나 했을 때 토끼가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토끼와의 처음부터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구성이나 주인공은 전혀 달랐으나 그 이야기로 소설을 썼었다.

학교 소설 수업시간에도 그녀가 강의를 했던가. 기억이 희미하다. 그녀가 교수님석에 앉아있었던 것도 같고, 후배들 수업을 했던 것을 내 기억이 만들어낸 것도 같다. 빨치산의 딸을 썼다는 그녀, 그녀의 글을 좋아해서 '봄빛' 같은 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계간지에 작품이 실려있으면 꼭 보곤 했다. 

그녀의 이 소설이 몇몇 유력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해졌다고 했을 때, 내가 예전에 찜뽕해둔 누군가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기뻤다. 우스운 얘기다. 글을 쓰겠다는 나는 여전히 습작생 신세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데도 이미 소설가 반열에 올라 교수인 그녀가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지니, 기쁘다니, 그럼에도 기뻤다. 언젠가 그녀의 글이 빛을 발하기를, 그 가치를 세상이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그녀의 단편소설 중,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좋은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 읽어봐야겠다. 

아버지 사고 소식이 들려오던 순간부터 죽음까지, 병원에서 장례식장까지, 산재로 그의 사고를 마무리짓기까지 몇 달의 시간은 버거웠다. 그전의 나의 삶부터 현재까지, 실은 그 죽음 속에 여전히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죽은 뒤의 결심과 그 결심을 약간 철회하였음에도 그때의 의지 같은 것은 여전히 내게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결혼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겨우 그러고 싶은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돼 인연을 맺은 것도, 그의 죽음이 빚어낸 시간의 연속 속에서 지금을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나의 아버지의 죽음을 글로 쓴다면, 투철한 의식을 가진 이도 아닌, 결국 노동자로 생을 마감한 나의 아버지, 그의 죽음 속에 그의 한 생애와 한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나 또한 나의 인생과의 화해를 위해 그에 대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신파 없이는 인생은 쓰여지지 않는다'는 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뿐인데, 그것은 내가 여전히 내 생을 동정하는가, 하는 질문에 닿는다. 그녀 역시 빨치산의 딸로 발목 잡힌 인생, 교도소에 간 아버지, 그의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들과 화해하는 그 죽음의 길목을 소설로 쓰며 죽음이 부활이며 화해나 용서를 위한 하나의 관문 같은 것이라 하였듯, 한 인생의 질곡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여정 속에서, 그의 삶에 대해 가졌던 온갖 감정들이 풀려나는 그 응어리를 한 편의 소설로 썼듯,… 결국 소설은 심장을 꺼내야만 쓸 수 있다는 깨달음을 근 20년 전 좋아했던 소설가의 장편소설, 그녀의 생애의 심부와도 닿아있을 소설을 보며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 

그간 나는 심장을 꺼내 글을 썼던가, 심장을 꺼낼 용기, 그녀는 아마 첫 소설부터 그 심장을 꺼낸 것 같은데, ...

20년 동안 헤매던 세상이 한 줌 같기도 한데, 그 걸음걸음 헤매임도 떠오르고, 언젠가 집 근처 대학인 상명대 도서관에서 그녀의 소설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도, 그때 만나던 사람도, 선연하여 20년 전 같지 않기도 한데, 금세 시간이 이리 흘러 눈앞에 그려질 듯도 한데 모두 연락할 수 없을 만치 멀어졌으나, 그녀가 여전히 좋은 소설을 쓰고 있고, 그녀 또한 마음에 품은 것들을 이리 소설로 펼쳐보이며 살고 있구나, …



사람은 어떻게든 세상과 만나야 한다. 

노동으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무엇을 하든.

소설을 읽고 든 또 하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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