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강명 작가 책을 두 권이나 다 봤다.
거의 앉은 자리에서 독파 수준이다.
지난 주에 친구집에서 본 책은
<한국이 싫어서>
제목 백만 프로 공감
엎드려서 두, 세 시간 보니 다 본 듯 해서
이렇게 읽게 하는 힘은 뭐지 궁금해서
일요일 새벽 12시부터 5시까지 본 책은
<호모 도미난스>
그래서 오늘 엄청 힘든 하루였다ㅠ
예전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웃기지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크루서블>(작가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이럴 수가. 유명한 아자씨인데...)
이런 책들을 밤에 앉은 자리에서 다 봤다.
그리고는 짝짝짝 박수를 쳤던 기억이 여러 번.
재밌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고 읽다 보면 빠져들어서
그랬다.
<호모도미난스>는 이우혁의 <퇴마록>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꽤나 열심히 읽었는데
자율학습 시간에 읽다가 사회 선생님한테 이런 쪽지를 받았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면 모를까 이런 책을 자율학습 시간에 왜 읽는 거니?'
그때는 무슨 이런 고리타분한 말씀을
이라고 생각했지만
읽어보니
도스토예스프키도 재미있다.
<죄와 벌>은 어느 살인자의 참회 이야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자식은 누구일까요
정도로 요약된다.
내용 자체는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여기 도덕적인 문제가 개입해 들어가며 주제가 확장되는 형식이다.
<퇴마록>은?
정말 열심히 읽었음에도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충분히 다양한 역사적 고리들이나 맥락들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왜 <호모도미난스>를 읽고 나서 떠오른 게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퇴마록>이었을까?
소설은 몇 번의 반전이 있다.
사건 해결의 핵심을 이루는 반전이다.
전체 내용은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르는 마법(대신 전염병성 바이러스)를 얻은 자들의 이야기다.
과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가 이 소설의 중심
지배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배 욕망을 자제시키는 데 능력을 쓰는 사람도 있다.
주인공은 선한 자
그가 어떻게 호모도미난스가 돼서 맞서 싸우는가 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맞서 싸우다 부딪히는 몇 번의 딜레마에서
반전이 중요하게 기능한다.
주인공 시현이 힘을 더 얻게 된다든가
쿤이 알고 보면 이쪽 편이었다는
반전이 그 주다. (이건 대박 스포일러이무니다ㅠ)
어딘가
영화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설정은 무엇이고 문학적인 설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들어
까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페스트 역시 급박한 전개를 하면서도 이런 반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다.
아직 다시 안 읽어서 뭐라 말은...)
어쨌든
실제 인생은 이런 반전이 잘 없다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
내가 쌓은 탑이 나에게 무너지고
내가 쌓은 탑을 누군가 우러러 본다.
그러니까 실제 인생과는 다른 스펙타클
이런 측면에 '영화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 같다.
영화는 두 시간에 내용을 해결하기 위해 '반전'을 잘 사용한다.
그럼에도 소설은
흡입력 있고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러나 소설을 덮어도 실은 상관없다.
내 인생과는 무관하다.
(밤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덮어도 상관 없구나.)
소설 속에서 누군가 말하는 대로 하건 말건...
나는 내일 회사에 가야하고
아마 회사에서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고
고무줄처럼 늘어진 일상 속에서
끊어지지 않기 위해 버팅기는 힘 정도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이유는?
덮으면 다시 읽기 힘들다
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덮고 일주일이 지나면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설정은 휘발되고 인물은 누가 누군지 헛갈리므로
영화관에서 우리를 가둬놓고 어떤 설정, 인물들을 주입하는 것과 달리
소설은 덮으면 끝이다.
페북을 보고 네이버를 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소설은 덮인 채로 그 자리에서 멈춘다.
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 이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의 소설은
현실과의 관계성은 떨어지고
대단히 미적인 경우도 있고(<눈에 대한 백과사전>이 그런 게 아닐까)
내 현실은 그런 것들 속에서 수영하다가는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다.
어쨌든
이 책은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다 읽고
김진명, 퇴마록의 이우혁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주인공의 캐릭터 면에서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던 한국 문학은 이제 장강명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가 뭘까
물론 그런 한국문학의 보수성을 몹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약간 또 아쉬워지는 느낌도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가버린 건가
그런 탐미적인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던 시대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요새는 차라리 에세이집을 보는 듯 하다. 잠깐 폈다가 덮어도 내용전개를 떠올릴 필요 없는.)
한편으로는 소설의 본래의 기능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래서 다음에 어쨌는데
라는 그 기능에 집중하는 걸 수도
라고 생각했다.
<한국이 싫어서>
는 좀 더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좀 더 밀접하게
지금 내 현실
말이다.
지하철에 낑기는 일상 속에서 존엄은 무너지고 모두가 그렇게 살며
도저히 아무리 해도 이 일상은 내 힘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래서 다들 떠나고 싶어 하는
이 현실
말이다.
(이러니까 호모도미난스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나 싶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치열한 경쟁 현실이 호모도미난스 같은 인종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소설 읽다가는 너 물에 빠져 죽어
라는 이 한국 사회 현실을 떠나는
나의 이상을 대신 실현해주는 한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에 나온다.
카타르시스 파바박
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호모도미난스>도 그런 측면이 있구나.
내가 하라면 하는 사람들. 그게 뭐든 이유도 조건도 없이.
이 내 맘대로 되는 것 없는 세상에
장강명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럼 나는 왜 옛날에 '마의산'이며 '크루서블'을 밤새서 읽었을까.
그때는 좀 더 여유로운 나날이었나.)
2015년
8월 10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