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만화 '뽀빠이'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라깽이 올리브는 어느 날 먹성이 아주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이렇게 외쳐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그때 저는 전문 용어로 돈오돈수의 경지에 고고히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보는 먹보같이 사랑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계산적인 사람은 계산적으로 사랑하고, 깨끗한 사람은 깨끗하게 사랑하겠구나.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람이 뭔가를 아주 좋아하면 세상만사를 그걸로 설명할 수도 있구나.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돈을 좋아하는 사람 눈에는 세상이 온통 돈으로 보인다고. 그때 이후로 줄곧 제게 남은 문제는 하나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저는 뭔가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하나의 사랑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모든 것에 답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결국 디테일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디테일로 기억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 사전'에 나오는 한 남자의 편지에서처럼요.
그래서 "책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에 저는 무수히 많은 디테일로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충동, 능력, 게으름, 타성, 우정, 불안, 고통, 회한, 슬픔, 욕망, 상상력, 기억, 위로, 정체성, 공감, 재탄생, 창조, 이 모든 것에 대해서요. 저는 이러한 디테일을 책을 통해 조금씩 배운 듯 합니다. 저는 책을 읽고 한 발짝씩 나가며 거기서 배운 디테일들로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일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거래되는 세상에서 사랑만은 유일하게 거래할 수 없습니다. 사랑만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됩니다. 삶은 이 세계에서 내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어?"라며 삶을 수수방관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오늘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바꾸어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힘 있게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아닐까요? 나의 삶은 유한하지만 애쓰고 있다는 것.
p.16-18
나는 책 읽는 게 좋다. 시원한 바깥에서 나무는 한들거리고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뭉게뭉게한 데서 책이나 읽음 좋겠다는 게 내 소망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책은 사유의 기록물이라, 인간이 사유하는 이유는, 원생동물처럼 사유하며 꿈틀꿈틀대는 게 아니라, 사유한 것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라, 결국 이 사유가 어떤 행위가 돼야 한다. 어떤 행위를 할까, 계속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이제 뭘 하지???
이게 책 읽기의 종착점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다르다. 사유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유는 혼자 하는데, 행동은 누군가와 하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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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특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보려는 데서 시작됩니다. 책은 말만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을 애써 표현하려는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말을 하게 하는 열정의 토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삶에서 책이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일 겁니다.
-p.90
우리에겐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어떻게 생기는가 깊이 성찰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의지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무게로 치자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단한 핵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행성이 되고 또 그만한 무게와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맘껏 세상에 흩뿌려 보지 못한 사랑의 무게, 열정의 무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지 때문에 편안함을 잃게 될 수도 있고, 단잠을 자지 못할 수도 있고, 수입이 줄어들 수도, 쓸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고 그것을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현실을, 그리고 시간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합니다.
-p. 44
요새 정혜윤 작가에게 관심이 생겨 행복해지려고 책을 빌렸다. 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하니까, 그러면서 배울 수도 있으니 좋아서 행복해서 빌렸지만, 결국 그렇다. 그래서 뭘하지?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구름 뭉게뭉게한 데서 책만 읽으면 배가 고파지고 그럼 배를 채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 행동하며 돈을 벌다보면, 내가 만나는 세상은, 좀 서글프다. 이 작가의 책을 읽고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읽으며 시장의 논리라는 것은 전혀 별개임을 듣긴 했는데, 정말 시장의 논리는 아주 다른 별세계다. 그곳은 '나'의 '이득' 이외의 다른 가치는 거의 소멸 상태인 곳이다. 나는 '시장 논리' 이외에 '다른 가치'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들 정의를 말하고 인간성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힐링을 말하는데, 그가 행동하는 것은 '시장 논리'에 따라서 '나'를 위해서만 행동한다. 다른 가치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아마 내가 말로 벌어먹고 사는 데서 살아서일 테지만, 그러니까 그들의 '말'과 그들의 '문자'와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행동' 사이의 거리야말로 별세계라 나는 그 거리를 가늠하다 지쳤다.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하게 된 사람처럼.
그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혼자 생각하는 것 말고 누군가를 만날 때
그때말이다.
게으름은 '자기 자신을 얕보는 정신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도 무시합니다. 이 무시는 말로는 겸손의 모습을 띱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어요. 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알겠어요?" 자기를 무시하는 인간은 속으로 남도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너도 별 수 없는 인간이잖아."란 말이 바로 그런 겁니다. "너도 별수 없잖아." "인간은 누구나 그래." 이런 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해서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말에서 전 생애에 걸친 변명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겐 좋은 능력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뭔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 말입니다. "무지하니 그만두겠어."가 아니라 "무지하니 더 해 봐야지.", "무지하니 배우겠어."라고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가 계속 노력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분야에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p.58-59
비극적이게도 세계와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없는 불일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각자 자신의 조건과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의 조건과 한계를 넘어섭니다. 이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살 수 있습니다. 선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 혹은 의도했던 것보다 놀라운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중략)
실제로 우린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 중엔 알고 한 것도 있고 모르고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언가를(가장 중요하게는 자기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키우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게 한 마리를 바다에 돌려보내는 것도 모두 다 함께 오랫동안 행하면 진화의 흐름을 바꿔 놓습니다. '선택'이야말로 운명이란 말을 대신합니다. 요샌 운명이란 말도 너무 고전적으로 들립니다. ('운'이란 말이 더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것, 그래서 뭔가를 선택하는 게 바로 삶입니다.
-p.66-69
이 책에서도 "그렇게 살아도 돼요?"라는 질문으로 마지막을 맺는다.
그래도 된다가 답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만난 세상은 내게 그렇다고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다 "너 바보 돼!"가 오히려 내가 만난 세상이었다. 어쩌면 내가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해서일 수 있지만, 한들한들 책을 읽고 책에서 말해준 가치에 따라 행동하려 하면 자꾸 행동반경은 좁아져만 간다.
그러니까 너무 아름다운 얘기만 해서 때로 화가 났다.
이 책, 세상은 참 아름답지만 참 추악하기도 한데, 그것을 어쩌란 말인가요
계속 밀고 나가라구요?
정말요?
정말요?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도 없는 세계 속에서 사랑도 받고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사랑하지만 경멸도 하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날 사랑해주었으면 하지만 받은 만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연인이 세계입니다. 우린 나름대로 불만을 안고 삽니다. 그 불만은 세계가 나를 충분히,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입니다.
(중략)
우린 그렇게 고백합니다. 너무나 어리지만 노회하기 그지없는, 너무나 늙었지만 순진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향해. 자기 언어가 조금 섞인 낯선 언어로. 이 사랑을 멈출 수 없다고. -??
나는 여전히 이 단계다. (물론 내가 더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해서겠지. 그래서 일 거야. 이 마음이 더 커서 또 어떤 책을 찾겠지. 어떤 사유의 기록물을)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면 좀 빡치고 그런데도 좋고
그렇다.
좀 더 생각해보니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2015. 7. 2. 17:21
우리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은 원형이라고 할 만한 어떤 하나에서 시작되어 계속 덧붙여집니다. 능력을 사랑이란 말로 바꿔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엔 두 사람이 만나 셋이 되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동안 나머지 한쪽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어떤 것, 새로운 세계관이든 잊을 수 없는 경험이든 진리든 뭐든 제3의 것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최초의 만남에 뭔가를 계속 덧붙일 때 가능합니다. 최초의 만남, 감탄, 호기심에 계속 뭔가를 더하는 것, 나와 뭔가가 만나 새로운 것이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사랑하는 자의 능력입니다.- P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