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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病의 기록
귀차니스트  2005/01/10 10:31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자신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세계를 치밀하게 건설한 사람. 불 붙은 양초가 마지막엔 초가 아닌 심지를 태우듯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마지막에 자신의 생마저 그 불꽃에 내던져 버린 사람. 전혜린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전혜린의 수필을 사후에 묶어낸, 시기적으로만 보자면 유작인 셈이다. 때문에 그 내용에는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전혜린의 면면이 드러나 있다. 이른바 열병(熱病)의 기록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던 책이 있었을까? 마지막장을 넘기고 싶지 않다는 그런 느낌. 신국판 정도의 크기에 350여 페이지가 되는, 그렇게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 책을 다 읽는데 약 열흘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마치 내가 그 열병에 전염되는 듯 했다. 인쇄된 문자를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의미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열이나는 그런 경험. 그 열병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되도록이면 책을 아껴보고 싶다는 생각. 가능한한 천천히, 서서히, 그의 열병을 나도 겪고 싶다는 소망.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졌던 느낌이다.

 

흔히들 말하길, 수필은 삶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노친네들이 쓰는 글로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읽기엔 그다지 좋은 장르의 글이 아니라고 한다. 나 역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야할 나이의 사람들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열하게 자신을 불태우며 살아간 한 사람의 삶의 기록인 이 책은, 오히려 우리를 열병의 바이러스에 감염시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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