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천천히 읽기
  • 미쓰윤의 알바일지
  • 윤이나
  • 11,700원 (10%650)
  • 2016-06-30
  • : 243
갑작스런 녹취 알바에 투입되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세상에서 가장 빠듯한 마감을 하던 중이었다. 사람은 가장 바쁘고 가장 절박하게 시간이 촉박한 일을 할 때, 그 일만 빼고 세상 모든 것이 다 재미있어지기 마련이다. 바탕화면 정리나 책상 청소 같은 사소한 것부터 가스렌지의 묵은 기름 때 닦기, 욕실 구석의 곰팡이 제거, 신발장 속 신발들 계절별로 분류하기 같은 생전 하지도 않던 청결 활동까지, 지금 코앞에 닥친 가장 다급한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이 그렇게 즐거워질 수가 없다.

물론 그 유혹들을 뿌리치지 못하면 말 그대로 망한다. 프리랜서의 노동이란 그런 말도 안 되는 유혹들을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정신력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세상 그 어떤 프리랜서도, 아니 세상 그 어떤 노동자도 바쁠 때만 되면 즐거워지는 일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라고 내가 규정해버림). 10시간에 가까운 대화들을 빠른 시간 내에 텍스트로 풀어내야 하는 와중에도 책보다 아름다운 굿즈를 눈 앞에서 흔들어대는 알라딘은 내 친구, 내 친구 지니의 유혹에 화답하기 위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신간 목록을 스캔했다. (아직 다 읽지도 않은 책들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도 또 책을 사는 도서 호갱 분야에 있어서는 나야말로 전문가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음성 파일을 반복해 들으면서 들리는 말을 온전히 문자화하는 녹취 작업은 언뜻 쉬운 작업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척추와 모든 정신을 녹음된 음성에 집중하는 고도의 집중력, 실제 말의 속도에 준하는 엄청나게 빠른 타자 실력까지 모두 갖춰야 하는 나름 극한 알바다.(징징) 여튼 그러다보니 쉽게 피곤이 몰려오고 집중력은 금방 흐트러지기 십상. 1시간쯤 녹취를 풀다가 전자책 단말기를 열어 좀 전에 컵을 샀더니 알라딘이 하사해주신 전자책의 리스트를 펼쳤다. 스스로 극한 알바에 투입되었다고 믿는 무의식이 누군가의 알바일지에 구입 버튼을 누르게 한 것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자책 구입목록 최상단에 <미쓰윤의 알바일지>가 떠 있었다.

1시간 동안 녹취를 풀고, 10분동안 세 챕터씩 남의 알바 인생을 읽으며 극한 알바 에너지를 충전했다. 으악 안 들려! 옘병 이게 무슨 소리야! 괴성을 지르다가도 <미쓰윤의 알바일지>를 세 챕터쯤 읽으면 금세 머리가 말랑말랑해졌다. 하하, 인생 참. 뭐 별거 있나. 하하. 까짓 거. 다시 시작해볼까. 그리고 다시 욕을 하며 타이핑을 하다가, 다시 인생 뭐 있어, 하며 녹음 파일을 재생하기를 몇 번 반복하자 녹취 작업이 끝났다. 하하 참으로 고마운 책이다.

책에는 내가 있었다. 무언가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 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다가도 될 대로 돼라 마음을 놔버린 나. 마음을 놔버리자 그냥저냥 썩 나쁘지 않은 인생을 즐겨버리게 된 나. 때로는 한없이 하찮고 쓸쓸한 시간들이 조금은 슬플 때도 있지만 그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게 대견한 나. 남들에겐 잘도 나불대던 미래 타령이지만 정작 미래를 도모할 수 없는 나. 오늘의 내가 무엇이 될지 모르는 채로 살아보겠다고, 무엇이 됐든 무엇이든 되고 싶다고 말하는 나. 그런 내 인생을 좋아할 수 있는 나.

분야도 장르도 형식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온 그녀의 이력 가운데 나의 알바 인생과 장르가 겹치는 일들도 꽤 많아서 미간을 누르며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크으 저 그거 뭔지 알아요 크으 그거 진짜 돌아버리죠 크으 통장 잔고 만세. 나는 그녀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못해서(?) 당장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자주 취직을 했다. 그 덕에 또한 자주 퇴사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 선택이요 입사도 퇴사도 알바도 단기 계약직도 어느 것 하나 후회해본 적은 없다.

나는 이 책이 '2030 세대의 비루한 생존기'라거나 '헬조선 젊은이들의 고단한 현실'이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아니 이 책이 어딜 봐서 취업난 속에 정규직 자리를 얻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알바만 전전하며 사는 슬프고 딱한 헬조선 젊은이의 인생 기록이라는 것이냐. 일의 경험이란 게 원래 풀어놓으면 어딘지 모르게 고단하고 팍팍해보이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그녀의 알바 인생은 결코 떠밀린 삶이 아니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또한 아무리 반복적인 육체 노동이라 해도 그녀는 자신의 노동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일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을 체득할 줄 알았고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귀한 고민들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그러니 헬조선 젊은이의 웃기고 슬픈 노동 일기라는 식의 정의는 이제 그만 거두어주시길.

20대 중반에 했던 영화 DB 입력 알바는 정말 지루한 일이었다. 영화 줄거리와 주연 배우를 포함해 영화에 참여한 모든 스탭과 배우들의 이름을 찾아서 입력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컨트롤C, 컨트롤V를 반복했으니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나갔다. 감독 홍길동, 조연출 김길동, 촬영 박길동, 조명 최길동, 스크립터 이길동, 주인공 엄마 김말자, 주인공 상사 김철수, 경비원 박철수, 여직원 김숙자, 동네 주민1 김영자...
와 뭔놈의 영화 한 편에 이렇게나 많은 인간들이 투입되냐! 비명을 지르다가 문득 영화 DB에 새겨진 이름이 아니면 존재도 모른 채 지나갔을 수많은 무명씨들을 떠올렸다. 주요 스탭들의 카페 라떼와 얼음물을 갖다 날랐을 막내 스탭과 한 나절의 기다림 끝에 1분여의 등장 뒤 홀연히 촬영장을 떠났을 단역 배우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누구도 고려하지 않을 이름들.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애쓰며 씩씩하게 자신의 일을 해냈을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었다. 갑자기 허리가 곧추 세워지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헐, 나 되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아.

세상은 픽셀 단위의 노동으로 굴러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픽셀 정도의 자리를 담당한다.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파트타임 알바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검푸르죽죽한빨강색 1픽셀을 담당하고 누군가는 누르스르멀건크림색 1픽셀을 담당할 뿐, 누구의 색도 특별히 중요하거나 특별히 하찮지 않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인 삶의 기록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는 성실한 픽셀들의 이름을 끊임없이 호명한다. 읽다보면 자꾸 내 이름이 불려지고 내 친구들이 우글우글 모여들고 그녀의 목소리가 겹겹이 덧입혀진다. 뭐 힘들었지만 괜찮아, 나 좀 열심히 잘 살고 있거든. 당신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세상에 미안해하지 마. No more wor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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