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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
  • 콘크리트 유토피아
  • 박해천
  • 13,500원 (10%750)
  • 2011-02-28
  • : 1,726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야구공을 주고받고 개천가 공터에서 시합을 벌이다가 <인조인간 캐산> 같은 텔레비전 만화영화나 클로버문고 만화책에 대한 품평을 주고받곤 했다. 친구들과 뜨거운 한 철을 보내던 소년은 느닷없이 찾아온 생이별을 맞이하며 울음보를 터트린다. 어느덧 8톤 트럭 한가득 짐을 싣고 동네를 떠나가던 이들에게 손을 흔들던 소년은 다시는 친구들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후 소년은 반포의 한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간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지만 친구들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다. 아카데미 프라모델과 형형색색의 레고 블록과 플레이모빌에 둘러싸여 정체를 알 수 없는 문명화에 어리둥절하던 소년은 '집이 바뀌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사(史)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 이후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촘촘하게 분석하고 독특한 스토리텔링으로 정리한 이 책은 저자 개인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부터 출발한다. 개인과 사회가 기억하는 아파트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자, 생물이자, 개인이자, 집단이자, 문화이자, 경제다. 아파트는 살아 움직이지 않지만 아파트를 욕망하고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토건 권력은 아파트를 살아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었다. 전쟁의 상흔을 재빨리 지우고 근대화로 진입한 한국 사회를 과시하기 위해 1962년에 지어진 마포아파트부터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수백 개의 크레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쌓아올리고 있는 주상복합아파트까지, 그 짧고도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그동안 아파트를 다뤄왔던 수많은 책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이유는 픽션과 팩트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화법의 실험성에 있다. 아파트 자체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해 자신을 향한 욕망에 대항하고, 불만을 토로하며, 야심을 드러낸다거나, 강남 중산층 출신의 60대 남자를 화자로 설정해 자신의 세대가 바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열망하는 세력이었음을 털어놓는 자기고백적인 서술은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선에 입체감을 더한다. 

 

'팩트의 진술'이라는 형식으로 쓰인 2부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아파트 정치사와 변화무쌍한 주거문화를 여러 시각 자료를 통해 설명한다. 80년대 인테리어의 최신 유행이었던 베란다 가드닝이나 샤방한 레이스와 꽃무늬 천으로 점철된 홈패션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 냉장고와 세탁기, 텔레비전 등 백색가전은 어떤 생리에 의해 변모했는지, 가족 구조와 주거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방의 공간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여다보면 개인의 체험 속에 잠들어 있던 ‘삶’이 움찔거리며 일어나 시대와 개인의 역사를 비추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를 단순한 ‘건축물’로 한정 짓지 않는다. 마포에서 시작해 용산으로, 동부이촌동으로, 잠실로, 압구정으로, 분당과 용인으로 이어지는 부동산 노른자들의 형성은 그저 토건 권력이 꿈꿔왔던 유토피아만이 아니다. 그래서 아파트는 때로 무기체이자 자존심이며, 근대 이후 한국사회가 지향해왔던 욕망 그 자체이자, 야망과 절망을 반복했던 중산층의 처참한 생몰(生歿)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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