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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
  • 비행운
  • 김애란
  • 13,500원 (10%750)
  • 2012-07-18
  • : 20,388

 

 

뭔가를 계속 회피하면서 김애란의 새 소설집 <비행운>을 읽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습해지고 더워지는 책이다. 전체적으로 여름 느낌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기도 하고, 면지에 인쇄된 김애란의 사인 위에 '여름 비행'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면 더 덥다.


김애란 특유의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거의 사라졌다. 주제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두근두근 내 인생> 이전의 단편들에 비해 굉장히 섬세해졌다. '벌레들'의 경우 작가의 이름이 없다면 누가 썼는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김애란스럽지 않다. 문장의 섬세함만이 아니라 주제에 접근하는 시선 자체가 촘촘해졌다. 그게 한뼘씩 확- 자라버린 나무 같기도 하고, 꽃과 열매가 다 져버린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 같기도 하다.

 

나는 꽃이 만발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김애란이 좋았다. 짙은 초록으로 꽉 차올라 껑충 자라버린 김애란보다, 꽃으로, 열매에게로, 벌레에게로, 매미에게로, 여기저기에 시선을 옮겨붙일 수 있는 김애란이 좋았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은 성숙하고 단단하지만 매력적이진 않다.

 

그래도 이 소설집의 첫 작품으로 배치된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서른'은 한 번 더 읽고 싶었다.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선배는 곧잘 나를 '녀석'이라 불렀다. 그런 뒤 그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줄 때면, 뭉클하니 아늑해져 까치발을 든 채 '더요! 더요!'라고 외치고 싶어지곤 했다.

p15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학생 중에는 평소에 저랑 한마디도 안 하다 이따금 딸기우유나 초콜릿을 건네고 가는 여중생도, 말수 적고 속이 깊어 언제나 부모님을 걱정하는 남고생도 있었어요. 공부를 하도 한 탓에 수업 중에 코피를 쏟는 아이도,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토를 하는 아이도 있었고요. 그런데 언니, 요즘 저는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간는 아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요.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p297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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