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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았다. 아내가 상의도 없이 예매를 해버렸는데 나는 영화를 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21세기에 무슨 단종애사야?" 궁시렁거리며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는 나름 볼 만 했다. 천만 관객이 그냥 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철학도다. 그리하여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내에게 이리 말했다. 이 영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고대 그리스의 비극 "안티고네"가 하고 있어. "안티고네"는 철학적으로 다루어 볼 만한 이러 저러한 논쟁점들을 제공하고 있고 많은 사상가들이 그 주제를 집어들곤 했지. 나는 "왕과 사는 남자"에 그러한 논쟁점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어. 없는 거 같아. "왕과 사는 남자"에서 감독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전락한 왕과 서민성, 혹은 민중성이라 해야 할 것의 교점이었던 것 같아. 이론성, 사유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야. 흔히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그런 논쟁점들을 풍부하게 제공하지. 철학에서는 사유를 이러한 논쟁점과의 관계에서 정의해. 즉, 습관적, 관성적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계기가 논쟁점이고, 그러한 깨어남 자체가 곧 사유라는 것이지. 예컨대, 현대의 미술품 앞에서 우리는 사유를 당하지. 작품이란 우리의 관성적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야. - 이런 것들이 서양의 철학적 관점이다...


철학도로서 나는 이러한 관점을 동양적 세계에 적용해보려 하지만 매번 거기서 유의미한 어떤 것을 찾아내는 데 실패해왔다. 혹자는 이것을,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는 말로 표현한다. 유튭에서 달라이 라마와 레이디 가가의 대담을 찾아보라. 레이디 가가는 달라이 라마에게서 철학적인, 추상적인, 이론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듣고자 한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일상적 수준에서 답을 주려 한다. 문제는 달라이 라마가 레이디 가가의 질문 자체를 초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을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 솔직히 나는 동양에서 온 사상가들에게서 무능함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자 봐봐, 데이비드 봄과 달라이 라마는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어. 그러나 달라이 라마에게는 어떤 무능력함, 어떤 관념성이 있어. 현실에의 적실성을 잡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교황의 말들이 관념적이라는 의미에서... 동양의 사유들은 아직 이 관념성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등등.


철학을 인도-유러피언 전통의 서사 쟝르로 결론짓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니리라. 철학이 아직 유효한 것은 이 서구 전통이 지구의 주도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전통은 사라지거나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서구 전통의 근대의 확장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 확장 너머에서 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서구 전통이 지구의 주도적 문명임을 인정하더라도, 이 주도적 문명에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은 전혀 모순된 일이 아니다. 어떤 불만을 느끼는가? 예컨대 나는 이 서구 문명이 너무도 야만적이라는 데 불만을 느낀다. 예컨대 서구 문명은 바그다드나 테헤란에 융단 폭격을 가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로마나 아테네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한국의 경주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교황을 폭탄으로 폭살한다고 생각해보라. 서구 문명은 타 문명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다. 이런 것들을 뉴스로 지켜보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 이후 서양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 적나라한 위선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란 미국이 지구의 에너지 패권 장악을 위해 중동에 설치해놓은 대리 국가에 불과하다. 현상적으로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끌려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이란 미국의 욕망, 그 극단적인 욕망의 발현기관이기 때문에, 둘을 나누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린란드가 중동에 있었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을 발현하여 그것을 점령했을 것이다. 캐나다가 중동에 있었으면 미국은 이스라엘을 발현하여 그것을 점령했을 것이다. 트럼프가 가장 아쉬워할 일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하나 밖에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현대 서구 문명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전쟁을 생산했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 이런 문명이 지구의 주도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너무도 큰 비극이다. 


다행히도 이 문명은 약화되고 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중동 지배권 약화를 예상한다. 미국의 이란 침공은 그러한 흐름을 되돌리려는 갸냘픈 몸짓에 불과하다. 이 지역에서 앞으로 한 번 더 그러한 전쟁이 날까? 그런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그것은 또다른 "필요 이상으로 발발한 전쟁"이 될 것이다. 또다른 전쟁을 벌이기 전에 미국이, 중국이 안정적인 에너지 소스를 확보하는 것을 방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먹을 정도로는 똑똑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한국의 친척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다. 매우 똑똑한 분이셨지만 쉽지 않은 삶을 사셨다. 내가 대학생일 때 전국 무전 여행을 했었고 그 분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주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나에게 문제는 말이다, 나에게 항상 관심은 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까뮈를 읽으셨을까? 건강을 위해 조신하게 사신 적이 없으셨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담배를 피셨다. 그러다 몇 달 전 통화를 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ㅇㅇㅇ야, 나는 말이다, 나는 요즘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당뇨 등으로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무엇이 그 분을 변하게 했을까? 무엇이 그 분에게 더 많은 시간을, 더 많은 빛을 갈구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스피노자적인 절대 진리가 아니었다.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라" 라고 외치던 순간의 그 사업상의 충만감, 만족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자식들, 손주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고 걱정받고 있다는 감정이었다. 유치환은 지식이 그대의 고뇌를 다스려주지 못한다면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떠나자고, 그 그림자 하나 없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가자고 말한다. 사막은 고뇌를 다스려줄 수 있을까? 고뇌는 관계성의 한 양상일 뿐이다. 지식과 사막과 사업은, 철학은 고뇌라는 이름의 관계에의 갈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말해서 달라이 라마가 옳았을 지도 모른다. 동양의 사상가, 예컨대 유가의 사상가들이 옳았을 지도 모른다. 인간 조건의 가장 커다란 부분은 관계적인 것, 요컨대 가족 관계와 그것의 확장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적이다. 서구인의 삶에 완전히 체화되어 있는 독립성, 자립성에의 절대적 가치 평가가 이제 새로운 대안과 나란히 진열될 기회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서구 문명이 소프트웨어적 관점에서 이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본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더 심화되기를 기원한다. 현대의 사람들이 하나의 종합이기를 바란다. 


너무 두서없다. 어쨌든... 그냥 올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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