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비교하면 영화에서 장소는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각적으로 직접 호소하는 게 영화다 보니 더 그런 것같다. 한때는 인물이나 배우에 시선을 집중하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인물이나 배우 빼고 다른 걸 감상하는 취미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영화 볼 때 ‘가급적 인물 안 보기’를 시도한 적도 있다. 동시대 영화에선 영화 배경이 큰 느낌을 안 주는데 예전 영화를 볼 때면, 영화를 촬영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고, 그 궁금함이 지속하면 영화를 본 후 인터넷을 뒤지는 버릇도 생겼다. 비교적 최근 영화들은 그 장소를 추정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1950~1960년대 한국영화의 경우, 지금과는 완전히 바뀐 곳이 많아서 정말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 조사해놓은 게 있어서 어떤 영화를 어디서 촬영했다는 정보를 얻게 되면 호기심이 동하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생각나는 곳이면 여행 삼아 다녀올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탓일까, 이런 류의 책들이 있으면 싶지만, 그런 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전혀 없는 게 아니었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선생님의 저서 <영화,도시를캐스팅하다>(한티재, 2019)가 그런 책이다. 이 책에는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나온 영화들의 촬영지 14곳을 선정해서 그곳에서 찍은 영화들이 이 장소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제천, 함평, 인천, 군산, 영월, 삼척, 옥천, 파주, 춘천, 울산, 성주, 거제, 부산, 대구, 그리고 번외편으로 서울. 이 책을 읽으면서 전국을 영화 로케이션 장소 탐방이라는 콘셉트로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미나게 읽었던 꼭지는 ‘군산’이다. 문학 답사의 단골 방문지이기도 했던 군산은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촬영지로, 내가 본 영화의 인상과 잘 결합하면서 한층 생생하게 읽혔다.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이 주로 1990년대 이후, 지방 로케이션 장소 이야기에 할애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번외편은 1970~1980년대 서울을 다루고 있다. 흔히 이런 류의 생각에서 기대하는 예쁜 사진은 없지만, 오히려 글로만 읽으니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책 전체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라, ‘단꺼번에’ 읽기 좋다. 나는 한 꼭지 읽을 때마다 생소한 영화들이 나오면 왓챠에 그 영화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으면 ‘보고싶어요’에 표시하는 재미도 덤으로 가졌다.한국영화의 전성기 1950~1960년대 로케이션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게 아쉽지만, 이건 그냥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 영영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 슬프다.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는 때가 오면, 道樂 차원에서 내가 한번 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한 지 1년은 된 것같은데, 회원은 나밖에 없다.‘제천’ 꼭지에서 영화평론가 故 류상욱이 거론되어 반갑고 안타까웠다. 한때 천리안 영화동호회에서 친분을 가졌던 분이다. 나한테 들뢰즈 불어판 한 권을 빌려 가시고선 돌려주지 않으셨다. 이젠 영영 돌려받지 못하게 된 게 슬프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