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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책상
  • 금색 공책 1
  • 도리스 레싱
  • 16,200원 (10%900)
  • 2019-12-02
  • : 1,147
여기 작가가 한 명 있습니다. 이름은 ‘애나 울프’. 한때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이제 딸 재닛을 키우는 싱글맘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녀를 ‘자유로운 여자’라 부릅니다. 또다른 ‘자유로운 여자’ 몰리는 애나에게 어서 다음 책을 쓰라고 재촉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 작품이야 다행히 성공했지만, 인세도 언젠가는 끊길 거 아니니?”(1권, p.100)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애나는 어딘가 많이 지쳐보입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애나는 끊임없이 쓰고 있었어요. 검정, 빨강, 노랑, 파랑. 네 권의 공책을 빼곡하게 활자로 채웠어요. 독자는 애나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공책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그녀의 다양한 자아를 만납니다. 검은색 공책에는 작가로서의 애나, 빨간색 공책에는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의 애나가 담겨있습니다. 애나는 노란색 공책에 가상의 인물 ‘엘라’를 만들어 다음 소설을 써내려가고, 파란색 공책에는 진짜 ‘일기’를 씁니다.

애나의 공책들을 읽으며 일기장 검사를 받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일기장 검사를 받았고, 중학교에선 모둠별 교환일기를 썼어요. 누군가 이 글을 볼 거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자기검열을 하게 되죠. 글감을 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내용을 쓰지 않아야 할지 구분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서로를 증오하는 말을 쏟아내던 날 어떤 다짐을 했는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고립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애쓰고 있는지. 이런 것들은 절대 쓰지 않았어요.

나이를 먹으면서 구분하는 능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논리적인 것과 감상적인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되었어요. 어떤 것을 쓰고 어떤 것을 쓰지 않았는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애나의 공책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어요. 가장 무거운 주제인 정치도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요.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한 또래 친구들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로 날아가 어떻게 허송 세월을 보내는지, 영국에 돌아와 가입한 공산당이 어떻게 익숙한 세력다툼으로 변질되는지. 거룩한 정치 이념이나 위대한 지도자는 등장하지 않아요. ‘1950년대 영국 정치’로 책을 쓴다면 절대 실리지 않을 인물과 장면들이 그녀의 빨간색 공책에는 가득합니다.

파랑색 공책에서 생리가 갑자기 시작됐던 날을 이야기할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생리가 시작됐을 때 탐폰을 밀어넣으며 느끼는 불쾌함이라든가,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생리혈이 새어나올지 몰라 허벅지 안쪽에 힘을 주며 긴장하는 모습들. 여자라면 누구나 경험하지만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페이지들을 보며 깨달았어요. 아, 애나는 정말 모든 걸 다 쓰기로 했구나.

『금색 공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점이 바로 이거였어요. 애나의 모든 감정과 이야기들이 모두 적혀 있는 것. 우리가 사회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교육받았던 것들, 무의식적으로 배제시켜 왔던 것들,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까봐 숨겨왔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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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최초의 탐폰’이라는 평가나 페미니즘 문학에서 도리스 레싱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금색 공책』을 읽기 전 기대했던 것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애나는 종종 그 기대를 배신해요. 애나, 당신 자신을 위해 제발 그러지마,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도 많아요. 독자로서 지지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까지. 제가 기대한 것이 해답이었다면 레싱은 현실을 보여줬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애나 울프, 그리고 도리스 레싱에게 고마웠어요. 이렇게 날 것의 이야기를 남겨줘서 고맙다고요. 네 권의 공책을 쓰는 이유를 묻자 애나는 이렇게 답해요. “그야 물론 나 자신을 찢어놔야 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부턴 딱 하나만 쓸까해.”(2권, p.343) 그렇게 써내려가는 마지막 단 하나의 공책이 ‘금색 공책’이에요.

고요한 밤 책상에 앉아 공책을 바라보는 애나의 뒷모습을 떠올려봐요. 검은색,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공책으로 자아를 찢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애나의 뒷모습을요. 여러분의 공책은 어떤 색인가요? 아니, 몇 권으로 나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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